
연차 같아도 승진 밀려…보이지 않는 벽 형성
벤처·중소기업 두 기관 합병 반대 목소리 ‘봇물’
[일요서울 | 이범희 기자] 내년 1월 통합되는 산업은행(산은)과 정책금융공사(정금공)가 내·외부 악재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두 기관 직원 간 연차는 같아도 직급이 달라 보이지 않는 벽(?)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 또한 이들의 통합으로 벤처업계와 중소기업 업계가 업무상 타격이 불가피하다며 반대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이에 사측은 “통합과정에서의 잡음을 최소화 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9부 능선을 넘긴 ‘산은-정금공’의 앞날을 조명해 본다.
산은과 정금공이 통합을 앞두고 직원 간 직급 불균형 문제로 고민 중이다.
금융권과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산은 직원 가운데 같은 연차의 정금공 직원보다 직급이 낮은 인원은 무려 976명에 달한다.
정금공 3급 직원은 모두 팀장인 반면 산은의 3급 사원 중 48%만 팀장을 맡고 있다. 특히 1999년 입행 직원들의 경우 산은 출신 정금공 직원들은 모두 팀장이지만 산은 직원들은 여전히 팀원이다.
산은 내부에서도 통합을 앞두고 승진에 필요한 최소 연한을 채운 직원들은 승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자연스레 정금공 직원과 보이지 않는 벽이 형성될 수 밖에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직원은 “2009년 분리 전엔 입사동기였다. 그런데 지금 다시 통합하면서 그 동기는 나보다 높은 직급에 높은 수당을 받는다고 생각해봐라. 그것도 연봉제보다 호봉제인 우리 기업문화에선 더욱이 화가 날 노릇”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10월 산은 민영화 작업에 따라 정금공을 산은에서 분리하고 산은금융지주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산은 임직원 중 일부는 정금공으로 넘어갔는데 정금공의 승진속도가 산은보다 빨라 입행 동기라도 산은에선 팀장, 정금공에선 부장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임금도 정금공의 부장이 더 높다.
산은 관계자는 “화학적 결합을 위해서 직급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당장은 해결책이 나오기 어려운 분위기다. 산은은 “우선 조직개편안이 마련된 이후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며 “직급과 승진문제는 예산과 이어지기 때문에 금융위원회와 기획재정부의 허가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해법 찾기 고심 중
이런 분위기를 인식한 탓인지 금융당국도 기존 산은과 정금공 직제를 참고해 통합 산업은행의 새 직제를 만드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산은 직원들과 정금공 직원들이 입사연도 등에 따라 새 직제의 적용을 받으면 두 기관의 직원들이 모두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산업은행과 공사는 현재 직원들을 1급(부장)부터 6급(고졸 신입사원)으로 구분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정금공 직원들이 인사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겠지만 정금공에서 부장을 했다고 통합 산업은행에서도 부장을 하리란 보장은 없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정책금융의 수요자인 중소·중견기업들은 이번 체계 개편이 달갑지 않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정부의 정책금융 개편이 수요자인 기업을 배제한 채 공급자의 효율성 측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두 기관이 합쳐질 경우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지원 축소가 불가피할 게 뻔하다는 이유에서다.
그간 중소기업의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해온 연간 6조원 규모의 간접대출 상품인 온렌딩 대출도 산은과 정금공의 통합으로 인해 당장 사장될 위기에 처하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두 기관 통합 시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자금공급 여력은 약 29조 감소할 것으로 추정한다. 연결재무제표 상으로 통합 전 정금공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은 26조4000억 원, BIS위험가중자산은 185조1000억 원이다.
BIS비율 10% 수준으로 자금을 공급한다고 가정할 경우 추가 자금공급여력은 78조9000억 원이지만, 산은과 통합 시 BIS 자기자본 축소 등에 따라 추가 자금공급여력은 49조8000억 원으로 29조1000억 원 가량 줄어든다.
또한 동일인 여신한도 규정에 따라 기업들의 여신한도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동일인 한도는 산은이 자기자본의 20%, 정금공이 자기자본의 40%로 통합 이전에는 산은과 정금공이 4조원과 8조원씩 적용하지만, 통합 후에는 5조원이 돼 7조원의 감소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상황이 이렇자 중소·중견기업인들은 지난달 13일 정책금융공사가 개최한 ‘핵심 거래처 간담회’에서 산은과 정금공의 통합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쏟아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는 “두 기관이 통합될 경우 BIS 산출시 불이익이 발생하고 예금자보호 측면에서 위험자산 투자집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벤처시장에 자금공급을 확대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며 “이는 전략적으로 공급됐던 벤처투자정책·자금에 혼선을 초래할 수 있고, 곧 벤처투자시장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현행 체제와 같이 중소·벤처기업을 집중 지원하는 순수 정책금융기관 기능을 별도로 수행하도록 해 정책자금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벤처투자시장의 안정적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skycros@ilyoseoul.co.kr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