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1%를 들여다본다”

2006년 9월 괴한들에 납치됐다 두 시간 만에 탈출한 영화배우 이지현. 유일한 증거물이었던 그녀의 차가 완전히 불에 탄 채 발견됐고 범인들의 행적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결국 납치범을 잡기 위해 경찰이 선택한 것은 최면수사. 이지현을 상대로 최면을 건 수사관은 175cm 키에 쌍꺼풀 없이 날카로운 눈매·광대뼈가 나온 용의자의 몽타주를 만들 수 있었다. 2004년 부천에서 두 명의 초등학생이 목 졸려 살해된 사건에도 최면수사는 빛을 발했다. 역시 초등학생인 마지막 목격자가 “두 아이가 짧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청바지를 입은 남자를 따라 산으로 갔다”는 증언을 했고, 곧 차가운 주검을 춘덕산 꼭대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범행 동기나 증거를 남기지 않는 ‘묻지마 범죄’가 늘어남에 따라 최면수사에 거는 기대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반면 최면상태에서 뱉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 일선 현장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최면수사의 면면을 살펴본다.
사례 1 군산 살인미수 사건
2007년 9월 17일 세 명의 40대 남자들이 술을 마시다 오모(49)씨가 흉기에 찔려 중태에 빠졌다. 현장에 있던 마지막 목격자 박모(43)씨는 술 때문에 필름이 끊겼다며 더 이상의 증언을 할 수 없었다. 현장에서 뚜렷한 증거와 동기를 찾지 못한 경찰은 과학수사계에 도움을 청했다. 다음 날 18일 오후 박씨는 최면수사를 통해 사건 때 기억을 더듬어갔다. “동료끼리 사소한 이유로 말다툼이 났습니다. 이모(41)씨가 소주병을 깨고 오씨의 목을 두 번 찔렀어요.” 박씨가 최면상태에서 내놓은 일관된 진술을 바탕으로 경찰은 이씨를 추궁했다. 결국 전과 12범인 이씨는 범행을 자백했고 사건은 해결됐다.
사례 2 서울 강도 살인 사건
“<내가 감방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됐다>고 했어요.”
2003년 서울에서 한 주부를 흉기로 위협해 금품을 빼앗으려던 강도가 마침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찔러 죽이고 도망쳤다. 하지만 아내는 용의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목격자도 없어 수사는 벽에 부딪쳤다. 경찰은 여인에게 최면수사를 시도, 범인이 남긴 한마디를 건졌다. 또 용의자를 본 것 같다는 근처 식당 주인이 경찰을 찾아오면서 사건은 급진전 됐다. 경찰은 식당 주인을 상대로 최면을 걸었고 용의자의 인상착의를 얻을 수 있었다. 약 100여명의 출소자 사진을 추린 끝에 결국 공사장을 전전하던 범인을 붙잡았다.
최면, 본인이 거부하면 안 걸려
우리나라 최면수사 역사는 길지 않다. 1997년 처음 최면을 통한 범인 검거에 성공한 뒤 1999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에 최면수사 전담부서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수사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주로 강력 범죄나 실종사건에서 피해자나 목격자가 심리적 충격, 오랜 시간의 경과로 사건 관련 내용을 기억 할 수 없을 때 쓰인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최면상태에서는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최면술사의 암시와 유도를 받으면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면수사를 받는 당사자는 움직임이 잦아들 뿐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근육이 풀어지고 호흡이 느려져 잠든 것과 비슷하지만 정신은 말짱하게 깨어있는 상태다. 최면은 대상자와 거는 사람의 대화, 즉 상호작용이다. 영화 속처럼 일방적으로 최면을 걸어 누군가를 조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대상자가 최면을 거는 사람을 못 믿거나 최면을 거부할 경우 모든 암시를 무시할 수 있다. 특히 사건수사에서 최면은 피해자와 목격자만을 대상으로 한다.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은 의식이 집중된 상태로 거짓말을 하거나 상황을 조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면수사, 미궁 푸는 만능키?
전북경찰청은 지난 11일 최면수사를 통해 지난해 7건의 미제 사건을 해결했다고 밝혔다. 최근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범행동기가 분명하지 않은 우발적 폭력 사건은 하루 700건 꼴. 2003년 발생한 ‘포천 여중생 피살 사건’이 대표적 예다. 이 같은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최면수사가 포함된 프로파일링(범죄현장 조사·감식을 통해 범인의 프로필을 추적, 검거에 나서는 첨단 수사방식)의 성과가 두드러지고 있다. 전문 프로파일러는 전국 경찰서를 통틀어 34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활약으로 2006년 붙잡힌 서남부 연쇄살인범 정씨는 최면요법 책을 보며 최면수사를 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피해자들의 머리를 잔인하게 내리쳐 만약의 가능성을 없앴다.
반면 일부 수사관들은 최면수사 기법에 대해 반신반의한다. 한 일선 형사는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한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며 불신을 드러냈다. 국과수 강덕진 범죄심리과장은 “보통 사람들은 객관적인 사실도 주관적으로 받아들인다. 때문에 기억 자체가 왜곡되거나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최면상태에서 받은 진술은 현실에서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믿을 수 있다”며 최면수사가 모든 사건의 만능키는 아니라고 전했다. 150여건의 최면수사를 실시한 끝에 실제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된 경우는 10건 정도라는 2005년 국과수 통계 수치도 이를 뒷받침한다.
美, 최면수사로 미제사건 60%해결
미국연방수사국(FBI)은 영구미제사건 전담반을 설치하고 최면수사를 통해 약 60%의 사건을 해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수사관을 집중적으로 양성해 전문가의 영역에서 사건을 풀기 때문이다. 조용한 방에서 최면 유도문을 통해 이뤄지는 최면수사는 한 사람에 대해 1~2시간씩 걸린다. 담당 수사관은 하루 2건만 처리해도 상당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최면수사 결과가 증거능력을 갖지 못하지만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로서의 가치를 가지면서 전문가 양성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는 대목이다.
전북경찰 과학수사계 관계자는 “최면은 누구나 걸 수 있지만 최면수사는 다르다. 정보를 끌어내는 기법 자체가 달라 수사에 정통한 사람이 최면수사 전문가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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