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침체된 고미술시장, 목숨 걸고라도 활로를 찾아야
[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침체된 고미술시장, 목숨 걸고라도 활로를 찾아야
  • 조아라 기자
  • 입력 2014-11-10 16:30
  • 승인 2014.11.10 16:30
  • 호수 1071
  • 6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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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강진 청자박물관 감정서에 대해 ①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고미술 시장에 활기가 넘칠 수 있을까. 지금 인사동 뿐만 아니라 우리 고미술시장은 참으로 참담하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을 통해서 북한의 여러 목가구들이 컨테이너 가득가득 들어왔다. 또 중국의 부싯돌과 쌈지, 불상 등 문방구, 동기, 각종 철불 등 토속품 등도 상당량이 들어왔다. 중국제가 인사동에 넘쳐났고 우리 것과 혼돈돼 어지러울 때도 있었다. 중국 도자기 중에서도 꽤 괜찮은 작품들이 들어 오다보니 인사동 일각에 중국 도자기만 취급하는 꽤 큰 가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것들은 거의 안 들어오고 중국 고미술품을 거래하는 상인들도 드물어졌다. 그들이 어렵게 사서 모았던 양질의 도자기들도 중국 상인이 거의 다 되사갔다. 우리 고미술시장은 일부 거대한 상인을 제외하면 고사상태다. 그중에도 양심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상인도 있다. 하지만 중국 고미술품 가게도 거의 없어지고 있고 인사동은 중국 잡동사니와 가짜만 횡횡하고 있다. 참으로 큰 혼란이요 난국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결국 어떤 게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모르게 돼 대혼란이 초래된다. 독특하고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우리 고미술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이런 현상이 더 이상은 확대되지 않고 이보다 더한 대혼란이 아예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자기희생을 통해서라도 뜻있는 사람끼리 힘을 모으고 지혜를 모아 목숨을 내어 걸고라도 활로를 찾아 나가야하지 않겠는가.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한다’는 표현을 조금 지나치다고 할 독자가 있을지도 몰라 몇 가지 실례를 들고자 한다.

강진 청자박물관은 지난 2007년 청자상감과형주자를 구입했다. 본인은 1963년부터 20여년 강진 청자요지 조사 발굴 청자박물관 건립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역대 강진 군수, 강진의 주요인사, 청자박물관 직원, 청자제작연구소 직원은 아주 잘 알고 본인을 믿고 의지하며 잘 지내는 사이이다.

그래서 강진의 문화행사에 항상 초청돼 세미나에 참가했다. 발표도 하고 세계적인 강진청자 유적 보존문제에 여럿차례 의견을 제시했다. 강진 청자의 문제라면 언제나 서슴지 않고 참여해 도와줬다.

지난 2007년 초여름쯤 강진 청자 박물관과 최건 경기도 도자박물관장에게 연락해왔다. “강진 청자박물관에서 예산이 있어 모처럼 중요한 청자를 구입하려 하는데 선생님께서 감정위원으로 참여해 주시겠습니까”했다. 그래서 “강진 청자에 관한 일인데 물론 참여 하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강진 청자 박물관 관장과 조은정 학예사와 최건 관장이 유물을 가지고 와서 함께 보았다.

주전자는 아주 크고 잘생겼고 물대(주구)가 아주 특별하게 생겼으나 뚜껑이 없고 손잡이가 보수된 것이었다. 강진 청자박물관장이 감정서를 써달라고 하면서 본인에게 사정사정하는 이야기가 “강진 군수님이 특별히 거액을 들여 아주 좋은 청자를 구하라고 해서 백방으로 알아보고 이 유물을 겨우 구했습니다. 그런데 원매자가 15억 원 이상이면 팔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 여러 번 찾아뵙고 부탁드려 10억 원에 팔고사기로 양측이 합의를 봤습니다”라고 했다.

감정서에는 시대와 특징의 진위여부, 구입여부 등과 함께 감정가를 기입하게 돼있다. 사실 학계에서는 감정가를 적는 것이 언제나 불편하지만 감정평가서에 감정가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감사원 등 감사기관에서 구입하는 기관이 무엇을 근거로 가격을 정했느냐고 따져 묻기 때문이다. 지방의 작은 박물관에서는 전문성이 부족해 전적으로 외부의 학계나 전문기관에 의뢰해서 반드시 감정평가서를 받고 유물을 구입한다.

해서 문책징계 사유에서 자유롭다. 우리나라 모든 국·공립기관, 사립박물관에서는 모두 똑같은 절차를 거쳐 유물을 구립하고 있다. 본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근무하면서 30여 년간 국립박물관과 기타 공사립 박물관에서 위임받아 유물 구입 시 평가위원으로 감정평가를 써준 일이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본인의 소신대로 유물의 시대와 진위문제와 구입여부와 가격평가를 하곤 했다.


#청화백자 흥영부대부인 (興寧附大夫人)묘지
 조선 1456(世祖2)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1768호


묘지는 무덤 앞이나 무덤 안에 매장한다. 묘비는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이다.

바꾸어 말하면 묘비는 망자의 가계와 인품과 행적과 업적 등을 돌에 새겨 크게 만들어 지상에 세우는 것이고 묘지는 망자에 관한 사항을 기록하여 작게 만들어 땅에 묻는 것으로 땅속에 있는 묘비와 같다. 따라서 묘비가 없어져도 땅속의 지석을 오래도록 남게 하려는 의도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정치와 지배이념으로 생사에 관한 의식과 일상생활에서의 법도를 엄격하게 규정해 이에 따르도록 했다. 특히 장례와 제례에 관해서는 더욱 엄격하게 치르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높였다. 또한 유교적 성리학의 통치이념을 깊고 넓게 시행해 나갔다.

조선 초부터 묘지는 돌에 새겼다. 조선말엔 석회를 다져 거기 글을 새겨 명정같이 매장하기도 했으나 조선 초부터 이미 변치 않고 견고한 청자와 분청사기, 백자 등 도자기로 만든 지석이 크게 유행했다.

이 지석은 백자 바탕에 코발트의 푸른색(청화)으로 묘주의 행적을 기록한 조선 초기 청화백자의 제작시기를 밝혀 연구하는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다. 종전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조선 초인 15세기에는 청화백자를 만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지석의 기록에 의하면 1456(세조2년)7월4일에 묘주가 작고하고 그 해 10월 8일에 예를 갖춰 장례를 치렀다고 명백히 기록했다. 모두 여섯 장인데 첫 번째와 여섯 번째는 순백자에 기록이 없고 2,3,4,5장에 청화로 쓴 상세한 기록이 있다.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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