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아버지 살해한 아들
‘가정폭력’ 아버지 살해한 아들
  • 윤지환 기자
  • 입력 2008-04-23 11:03
  • 승인 2008.04.23 11:03
  • 호수 730
  • 3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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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만에 들통난 ‘천륜 깬 업보’

14년 전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이 공소시효를 1년 남겨둔 지난 14일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아버지를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 내 유기한 혐의(존속살해 등)로 김모(41)씨를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1994년 4월 초 서울 동작구 자신의 아파트에서 아버지(당시 64세)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 내 인근 재개발구역 공사 현장 폐기물 더미에 버린 혐의를 받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씨 가족들이 이 같은 김씨의 범행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점이다. 당씨 김씨의 가족은 피묻은 등산용 가방 등을 보고 범행전모를 직ㆍ간접적으로 알게 됐으나 신고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2년 가량 지난 뒤 지인들이 아버지의 소재를 묻기 시작하자 의심을 피하기 위해 관할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했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숨진 아버지를 1주일 정도 침대 밑에 방치해뒀다 집이 빈 틈을 이용해 시신을 절단했으며 2∼3일 간격으로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대에 등산용 배낭에 담아 옮긴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 결과 김씨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가족을 상습적으로 폭행했고, 가정에도 소홀해 오랜 시간 분노를 쌓아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수갑을 차고 경찰과 마주한 김씨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담담하게 범행사실을 털어놨다.

그는 “진술에서 차라리 이렇게 죄 값을 치르게 돼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처벌보다 더 무서운 죄책감에 시달렸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김씨의 범행이 드러나게 된 것은 최근 잇따른 여러 실종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실종·살인 사건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김씨 아버지 실종사건이 수상하다는 제보가 경찰에 접수됐다. 제보자는 김씨 아버지가 실종될 만한 뚜렷한 이유가 없으며 가족들의 행동도 수상한 구석이 다분하다고 경찰에 알렸다.

이에 김씨와 그 가족들을 상대로 조사하던 경찰은 아버지의 실종 경위에 대한 가족들의 설명이 제각각인 점 등이 수상하다고 판단, 조사 강도를 높였다.


가족들 범행알고도 묵인

가족들을 상대로 아버지의 실종경위를 집중 추궁한 경찰은 `김씨가 아버지를 죽인 것 같다’는 진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 가족들의 말을 듣고 10시간 동안 김씨를 설득한 끝에 범행 일체를 자백 받을 수 있었다”며 “김씨가 범행당시 지인에게 아버지의 시신 유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전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좀처럼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수시로 술에 취해 아내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단순 손찌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기물을 부수고 흉기를 휘두르는 등 그 정도가 심각했다.

아버지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가족들을 내팽겨 치고 따로 살림까지 차렸다. 그리고 한 번씩 집에 들를 때 마다 폭력을 휘두르고 가차 없이 생활비를 빼앗아가기도 했다. 이렇게 빼앗은 돈은 딴 살림살이에 쓰였다.

결국 차남이었던 김씨(당시 27세)가 참다못해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다.

김씨는 서울 사당동 집에서 아버지와 술잔을 나누며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폭력을 휘둘렀다. 그동안 참아왔던 김씨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태세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그러나 술 취한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흉기를 휘두르자 김씨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흉기를 빼앗아 아버지를 살해했다. 김씨는 피 흘리며 숨져있는 아버지를 보고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두려움에 휩싸인 김씨는 아버지의 시신을 자신의 방에 1주일 정도 숨겨뒀다. 하지만 시신이 부패하면서 냄새가 나자 시신을 토막 내 집 근처 재개발구역 공사현장의 건축 폐자재 더미 속에 묻어 버렸다.


이혼 우울증 중풍…범행 뒤 가족불행 잇따라

경찰에 따르면 가족들은 김씨가 시신을 처리하기 전에 이미 그의 범행사실을 직감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범행사실을 물어보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가족들은 김씨 방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로 그의 범행을 직감했다”며 “하지만 아버지 때문에 끔찍한 시간들을 보낸 가족들은 비록 끔찍한 살인자라 해도 김씨를 감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극적인 가정환경이 김씨를 살인범으로 만든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김씨와 그 가정엔 제 2의 비극이 찾아왔다. 아버지만 없어지면 모든 것이 편안할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김씨는 2년 후 결혼 했지만 혼인신고도 못한 채 6개월 만에 이혼해야 했다. 김씨는 이혼 직후부터 지금까지 뚜렷한 직업도 갖지 못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기억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 잘 때도 수시로 악몽을 꿨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당시의 기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뿐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는 범행 뒤 취직해 3∼4년 정도 일했으나 죄책감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것 같다“며 ”여동생도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다 2005년에 이혼했고, 남동생은 사업에 실패해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또 김씨와 단둘이 살아온 어머니는 중풍과 당뇨병을 앓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현재 시신 유기 현장에는 아파트가 건립돼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경찰은 관련자들의 진술이 일관된 점으로 미루어 범행이 인정된다고 판단,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윤지환 기자 jjh@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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