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모 줄었어도 영향력 무시 못 하는 ‘큰 시장’
단사천·백할머니·광화문 곰 등 버금가는 인물 이제는 없어
살짝 흘려본 ‘설’에 재벌 가족회의·주가 하락하는 경우도
[일요서울 | 강휘호 기자] 현직 판사가 사채업자로부터 돈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은 사건이 발생하자 세간의 눈이 명동 사채 시장으로 몰리고 있다. 판사에게 검은손을 내민 이의 직업이 사채업자라는 사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명동 사채 시장을 거점으로 사채왕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인물이다 보니 좀 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또 사채업자가 어떻게 법조계까지 손길이 닿았을 지, 명동 사채시장은 대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의구심도 커지는 상황이다.
[일요서울]은 이러한 의구심이 확산되고 있어 사채업과 연관성이 있는 인물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 해답을 명동사채시장에서 활동했던 전직 업자 A씨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A씨는 우선 첫 질문인 ‘정치권을 비롯한 법조계 인사들과 사채업자들의 관계’를 속칭 쩐주, 곧 돈을 대주는 사람을 기점으로 설명했다.
A씨는 “자금 동원력을 얻기 위해선 ‘내가 어떤 사람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때문에 화려한 인맥을 꾸려 ‘나는 정치권의 누구도 알고, 친한 판사만 몇 명이다’를 어필하는 것”이라면서 “또 정치권이나 법조인들은 말만 하면 돈이 나오는 자금줄을 가진 업자 한 명 안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커넥션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건에 연루된 사채왕 최모(60·구속기소)씨에 대해선 “나이로 보나 사건 정황으로 보나 기업을 예로 들어 사장의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십수 년 동안 사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인맥을 쌓았을 건 분명하고, 요즘 사채업자들은 흔히 배임·횡령 또는 작전 등으로 구속되는데 최모씨는 사기나 협박 등으로 구속기소된 것을 봐서 고리사채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실제로도 명동 사채왕 최모씨는 사채 시장의 큰손일 뿐 아니라 도박꾼들 사이에서는 공포의 대상으로 알려졌다. 사기도박단의 전주역할을 했던 그는 전국 도박판을 장악하면서 협박과 공갈을 일삼았고, 검찰과 경찰을 청부수사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말도 많다.
더불어 마약 사용도 서슴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그는 한마디로 명동 혹은 도박판에서 법보다 가까운 공포의 대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명동 사채 시장의 현실에 대해선 과거와 비교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명동 사채 시장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규모가 줄어든 것이 사실이며, 흔히 말하는 큰손들은 모두 사라진 상태다.
그가 지칭한 큰손이라 함은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에게도 돈을 빌려줬다고 알려진 현금왕 단사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주식을 배운 것으로 유명한 백할머니 고 백희엽씨, 그를 지나지 않고선 서울 땅을 건너지 못한다던 광화문 곰 고 고성일씨 등이다.
또 이미 기업화를 이룬 곳이 많고 기업 어음 할인 등이 주된 사업이다. 기업어음과 회사채 할인, 기업간 M&A 등을 다룬다는 것이다. 또 신용평가사와는 별로도 기업평가를 업계 내에서 다시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실제 한국의 대부업은 명동 사채 시장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자제한법이 폐지되자 사채업체를 이용했다가 고금리로 고통 받는 서민이 급증했다.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2년 ‘대부업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최고금리를 연 66%로 제한했다.
대부업체를 지방자치단체에 등록시키는 과정에서 대부업 양성화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일본계 대부업체가 국내에 진출하면서 대부업체의 대형화, 기업화가 진행됐다. 과거 고리대금업자들이 많았던 것에 반해 기업형으로 기업과 거래를 하는 사채업자가 많아진 배경이다.
그는 여담 몇 가지도 들려줬다. 그는 “사채업자들 사이에서 퍼지는 이야기들이 재벌들 사이까지 직접 전달되는 경우도 있다”면서 “일례로 경매 매물을 살펴보다 재벌그룹의 자제가 내놓은 품목이 있는 것을 봤다. 이를 살짝 시장에 흘려봤더니 바로 해당 기업에서 전화가 오더라. 총수 일가가 모여 가족회의까지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또는 자신들이 분석·예측하고, 흘려본 부도설로 인해 주가가 10% 이상 떨어진 대기업과 관련된 사연, 또 부도설이 실제 부도로 이어진 때 등 다양했다. 명동 사채 시장이 비록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규모가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어느 한 곳에서 자리잡고 돈이 굴러다니는 ‘메카’인 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사채 시장 주목받게 한 사건은
한편 명동 사채 시장에 대한 관심을 증폭 시킨 발단은 이른바 판사와 사채왕 사건이다. 현직 판사가 사채업자로부터 수억 원의 뒷돈을 받아 챙긴 정황이 드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해당 사건은 이 사채업자가 판사를 매수해 사기·마약 등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무마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아울러 해당 사채업자가 1000억 원 수준의 자금을 굴렸고, 이른바 명동의 사채왕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명동 사채시장 자체에 대한 관심도 집중됐다.
명동 사채왕 최모씨와 현직 판사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최모씨가 처음 재판을 받았던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000억 원이 넘는 돈을 굴려가면서 명동의 사채왕으로 군림했던 최모씨는 재판에 넘겨지는 상황을 맞았다.
사기도박을 통해 돈을 뜯어냈던 피해자의 옷 속에 마약을 몰래 넣어 누명을 덮어씌운 혐의였다. 여기서 첫 번째 의혹이 나오는데 최모씨가 해당 판사에게 수억 원의 돈을 주면서 재판에 도움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고, 판사는 이 대가로 사건 기록을 검토해주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최모씨는 증인들의 진술 번복 등으로 무죄를 선고 받는 것에 성공을 거뒀다. 판사의 입김이 작용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지만 정황상 의심을 받을 만한 상황에 놓인 모습이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내사에 착수한 지난 4월 이후 연루된 판사의 계좌 추적을 통해 판사와 최모씨 사이의 의심스런 자금 흐름을 포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울러 검찰은 최모씨가 자신의 각종 범죄 혐의를 벗기 위해 검찰 수사관에게도 뇌물을 건넨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관을 대상으로도 조사를 실시했다.
앞서 최모씨는 공갈과 마약, 사기 등 20여 가지 혐의로 2012년 4월 구속 기소돼 계속 재판을 받고 있다. 앞서 지난 5월에는 최모씨를 고발한 사람에게 마약과 사기도박으로 누명을 씌운 혐의로 60대 여성이 실형을 선고받은 바도 있다.
검찰은 앞으로 혐의 입증을 위해 제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확인수사를 진행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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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휘호 기자 hwihol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