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단독보도 ‘여선수 성폭행’ 끝나지 않은 이야기

소속선수를 성노예로 전락시킨 일부 몰지각한 운동부지도자에 대한 본지 기사(721호)가 나간 뒤 본지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본인을 ‘축구계 원로’라고 소개한 그는 무작정 “벼랑 끝에 몰린 한 선수를 도와 달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학시절 대표선수를 거쳐 수십 년 간 축구계를 지켜온 제보자 A씨는 3시간 가까운 긴 만남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놨다. “옛 제자인 여자축구계 유망주가 1년 전 모교코치에게 성폭행 당했다. 그것도 모자라 졸업을 앞둔 최근까지 계속 괴롭힘을 당해 선수생명이 끊길 위기”라는 것.
A씨에 따르면 버티다 못한 선수 B양은 지난달 말 “그라운드를 떠나겠다”며 백기를 들었다. 반면 가해자로 지목된 지도자는 “모함이다.
뜬소문으로 나 역시 피해를 입었다”며 혐의를 전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 방송사의 보도로 ‘여성운동선수 성폭력’ 실태가 드러나고 정부와 시민단체가 ‘가해자 일벌백계’를 약속한지 채 보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또 한명의 유망주가 선수생명을 잃을 처지에 몰렸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제보자 A씨가 전한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끔찍한 사건은 지난해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2학년 진급을 앞두고 있던 B선수는 ‘휴가 중 숙소로 돌아오라’는 C코치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선수단 모두 모이는 줄 알고 합숙소로 돌아온 B선수를 반긴 것은 코치 뿐, 숙소는 텅 비어있었다.
“빈 숙소로 따로 불러 성폭행”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만 “비품을 함께 사러가자”는 코치 말에 팀 주장인 B선수는 선뜻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비품은 학교에서 처리해주기로 했다”며 코치는 말을 바꿨고 선수에게 함께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다.
평소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 C코치가 저녁식사 뒤 호프집으로 B선수를 데려간 것부터 문제의 시작이다.
그날따라 C코치는 유난히 B선수에게 술을 권했다. 결국 취기를 이기지 못한 선수가 잠시 화장실을 갔을 때였다.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C코치는 제자의 손목을 붙잡아 화장실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스킨십을 시도하는 C코치를 완강히 거부한 B선수. 머쓱해진 C코치는 “술김에 장난한번 쳐봤다”며 제자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막상 숙소로 돌아오자 C코치는 본색을 드러냈다. C코치가 선수숙소에서 잠을 청하려는 B선수의 방문을 두드린 것.
결국 그날 밤 B선수는 성폭행 당했고 그녀의 선수인생도 꼬이기 시작했다.
“동료들 단체행동하자 협박”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 직후 B선수는 가장 친한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 B선수와 통화한 선수는 “언니가 울면서 전화를 해 무척 놀랐다. 겁에 질렸는지 상황을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코치에게 나쁜 일을 당했다고 했다”고 말했다.
소문은 팀 안에 삽시간에 퍼졌다. 결국 팀 동료들은 B선수를 위해 단체행동에 들어갔다. 훈련을 거부하고 팀을 무단이탈한 것. 하지만 이들의 ‘작은 반란’은 오래가지 못했다.
제보자 A씨에 따르면 C코치는 물론 팀 감독까지 나서 사건을 덮고자 협박까지 불사했다. B선수가 당한 일을 학부모들도 알았지만 섣불리 나서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팀 감독이 “일을 조용히 마무리 하지 않으면 동료들까지 모두 팀에서 내쫓겠다. 축구부를 없앨 수도 있다”며 B선수와 부모를 압박한 것.
결국 선수들은 이틀도 못돼 팀으로 돌아왔고 사건은 묻혔다. 멀티플레이어로 각광받던 B선수는 팀 주장 자리에서도 밀려났다.
“동성애 소문 퍼트려 괴롭혔다”
그러나 B선수의 시련은 오히려 그때부터였다. A씨 증언에 따르면 사건이 묻힌 뒤 C코치는 신체적 접촉 대신 또 다른 추행으로 B선수를 괴롭혔다.
한때 유난히 사이가 좋던 B선수와 또 다른 후배를 놓고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란 루머가 팀 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얼마 뒤 그 후배가 운동부를 떠나자 이번엔 “**이가 운동을 그만둔 이유는 B와의 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이란 낭설이 떠돌았다.
A씨는 이 같은 소문의 진원지로 C코치를 지목했다. 코치가 ‘문제를 일으킨’ B선수에 대한 악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루머를 퍼트렸다는 것이다.
C코치의 보이지 않는 괴롭힘은 선수가 학교를 졸업한 최근까지 이어졌다고 A씨는 전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B선수는 졸업 뒤 입단이 결정됐던 실업팀 유니폼을 입기도 전에 팀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업팀 관계자에 따르면 B선수가 팀을 떠난 공식적 이유는 ‘연습경기 중 입은 부상’ 때문이다.
이 관계자는 “선수가 가슴통증을 호소해 정밀진단을 권했다. 실력이 좋은 선수라 당분간 휴식을 취한 뒤 복귀하길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A씨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속사정을 다 아는 사람 입장에서 뻔한 것 아니냐. 사실이 알려져 또 다른 보복을 당할까 B
선수가 많이 괴로워하고 있다. 충격이 심해 정신과 상담까지 받는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C코치 “모함…나도 피해자”
한편 사건의 또 다른 당사자인 C코치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뜬소문으로 사람을 모함하지 말라”며 항변했다.
C코치는 “한때 선수들을 다독이기 위해 가벼운 스킨십을 한 적은 있다. B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선수와 코치 사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친근함의 표시였다는 거다.
C코치는 또 “학부모들까지 나서 문제가 됐던 것은 사실이지만 애초에 소문이 너무 부풀려졌다. 선수와 코치 사이를 넘은 부적절한 관계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런 ‘엄청난’일을 저지른 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아직까지 같은 학교에서 코치직을 계속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C코치는 “뜬소문에 엄청나게 시달린 나 역시 피해자”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잘 하라는 뜻으로 어깨를 토닥이는 것만으로도 성추행이라며 과민반응하는 선수들이 더러 있다. 남자지도자들이 여자선수들을 지도하며 부딪히는 애로사항중 하나다”고 말했다.
해당 대학팀의 또 다른 선수도 “(성폭행 관련) 소문이 돌았던 건 맞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잘 모르겠다”고 증언했다.
A씨 주장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관련 시민단체 “피해사례 제보 없어”
문화관광부, 교육인적자원부, 대한체육회 등 정부조직은 ‘스포츠 성폭력 근절대책’을 마련해 지난달 18일 발표했다.
대책안에 따르면 성폭력 지도자는 ‘영구제명’ 조치뿐 아니라 경기장 접근금지 등을 통해 선수와 격리된다.
문제가 된 경기단체에 대해선 행정·재정적 제재도 받는다. 또 대한체육회 안에 ‘체육계 통합 성폭력신고센터’를 둬 시민단체에 위탁·운영될 예정이다.
시민단체들도 적극적인 활동을 약속했다.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와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을 중심으로 전국 150여 시민단체가 스포츠계 성폭력 근절을 위한 ‘시민단체대책협의회(이하 시대협)’를 결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대책과 시민단체의 관심이 ‘사후약방문’이란 비난을 피하긴 어려울 듯하다. 지난달 15일 관련성명을 내고 대한체육회를 항의방문 하는 등 시대협은 눈에 띄는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앞으로 접수되는 피해사례는 ‘0건’에 가깝다.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 최혜숙 상담팀장은 “아직까지 단체 앞으로 등록된 피해선수들 이야기는 없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사실을 밝히는 순간 선수생명이 위태로워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기 때문이다.
최 팀장은 “시대협 전체회의에서 적극적인 실태조사를 해보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도자들이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솔직한 얘기가 나올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스포츠 성폭력 악습을 끊기 위해서 단 한 건이라도 피해자를 완벽하게 보호하고 가해자를 찾아내 일벌백계하는 사례가 나와야한다는 입장이다.
최 팀장은 “대부분 성폭력피해를 입은 선수들은 꼭꼭 숨는다. 혼자 모든 고통을 감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거다. 하지만 많은 시민단체가 연합, 피해자보호를 최우선으로 도움을 준다면 선수들의 믿음도 쌓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단 한 건의 모범적인 선례만 생기면 된다. 큰 용기가 필요하지만 선수들이 정부와 시민단체를 믿고 빨리 아픔을 털어버리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문화관광부 실태조사 ‘여자 선수 16.1% 성폭력 시달려’
여성 운동선수 중 100명 가운데 16명은 성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문화관광부 조사결과 드러났다.
문화관광부는 지난해 11월 3일부터 12월 27일까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의뢰, 여선수 1253명과 여성지도자 12명을 상대로 ‘프로스포츠팀과 직장 운동부 여성선수 권익 실태조사’를 했다.
결과 조사대상자 중 16.1%가 성희롱과 강제추행 등 직·간접적인 성폭력에 노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조사대상이 적고 민감한 질문인 만큼 드러나지 않은 피해사례는 훨씬 많을 것으로 관계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 같은 문화관광부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교육인적자원부와 대한체육회는 지난달 18일 체육계 성폭력 문제에 대한 합동회의를 갖고 대책안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성폭력지도자의 영구제명은 물론 경기장 접근금지 처분 등으로 선수와 격리시키는 방안이 들어있다.
또 체육계 남성지도자비율이 9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감안, ‘여성지도자 할당제’를 도입할 계획이다.
이 경우 전체 체육지도자의 20%는 여성지도자로 채워진다.
여기에 학생선수의 인권과 학습권 보장을 위해 초등학교 합숙훈련은 금지된다.
중·고교는 1회 합숙훈련이 2주 이내, 학기당 2회 이내로 제한된다. 이를 넘는 경우 학교 측은 관할교육청에 훈련계획을 내고 신고해야 한다.
한편 교육인적자원부는 “공부하면서 운동하는 학원체육 풍토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정규수업 이수 의무화는 물론 장기적으로 ‘최저학력제’ 도입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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