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vs 국립중앙박물관 충돌 막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의 칼날정책에 정부 부처들이 바람 잘날 없는 가운데 문화재청도 마찰음에 시달리고 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조직개편안을 둘러싸고 날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더욱이 두 기관의 대립은 시간이 흐르면서 기관장 간의 미묘한 감정싸움으로 변질되고 있어 진화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문제는 인수위가 문화관광부 직속기관이었던 국립박물관을 문화재청에 합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불거졌다. 이 안이 나온 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최대
공약인 ‘한반도 경부대운하’ 건설계획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국립박물관 쪽은 ‘통합이란 있을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티고 있다.
국립박물관은 대운하 건설에 앞서 사전 조사작업을 맡을 것으로 보이지만 문화재청과 감정의 골이 깊어져 그 결말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고개 숙인’ 국립중앙박물관 운명
인수위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 지방의 12개 국립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을 문화재청으로 합치는 정부조직개편안을 지난달 16일 내놨다.
이 안이 받아들여지면 문화관광부(문광부) 직속기관이던 국립중앙박물관은 문광부 외청인 문화재청 소속으로 들어가 문화재청의 관리아래 놓인다.
또 박물관장은 별정직인 차관급에서 1급 공무원(관리관)으로 직급이 낮아진다. 1945년 1급 기관장으로 시작해 2003년 용산으로 옮기며 차관급으로 승격, 참여정부의 ‘신데렐라’가 된 국립중앙박물관 위상이 5년 만에 반 토막 나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번 개편안에 강하게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다.
반면 문화재청은 1400명 규모의 ‘매머드 급’기관으로 올라선다. 지금의 783명 정원에 국립중앙박물관의 560명, 국립민속발물관 90명을 흡수한다.
규모만 보면 가히 큰 중앙부처 수준이다.
문화재청은 해방직후인 1945년 11월 8일 미군정 아래 ‘구 황실사무청’이란 이름을 그대로 이어 발족했다.
이어 1961년 문화재관리국, 1999년 1급 기관장급 관청이 됐다. 국립중앙박물관보다 1년 늦은 2004년에 차관급 관청으로 승격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맡던 업무는상당부분 문화재청에 흡수된다. 박물관운영·정책수립 등은 문화재청으로 넘어가고 중앙박물관이 지방박물관을 관리하는 체제로 고쳐질 전망이다.
박물관 “앉아서 당할 순 없다”
눈뜨고 주도권을 놓치게 된 박물관들의 반발은 불 보듯 뻔했다. 한국박물관협회 등 6개 단체는 인수위 발표가 나온 후 반대성명을 내며 “새 정부의 박물관정책은 박물관개관 100년의 문화적 의미를 무참히 짓밟는 처사”라고 맹비난했다.
김홍남 박물관장도 지난달 21일 공식 기자간담회를 통해 “한 국가의 대표박물관을 정부의 말단 행정기구로 보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또 박물관직원들 역시 문화재청과 박물관은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관계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런 입장을 전하는 과정에서 문화재청과 박물관 사이에 ‘감정 섞인 비수’가 오가면서 사태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지난달 29일 인수위 통합계획에 반대의견을 밝혔다. 간담회에 나선 그는 “통합하더라도 국립중앙박물관은 차관급으로 유지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얼핏 박물관의 손을 들어준 듯하다.
하지만 여기엔 ‘박물관을 문화재청 밑으로 통합한다면…’이란 전제가 깔려있다.
이에 김홍남 중앙박물관장은 다음날 ‘긴급’간담회를 자청했다.
누가 참여정부 ‘신데렐라’인가
김 관장은 “유 청장 말은 상당부분 왜곡됐다”고 직격탄을 날리며 “인수위가 문광부에 보낸 검토지시사항에 두 가지 통합 건이 있다. 당연히 문화재청 아이디어가 아니냐”고 격분했다.
유 청장이 인수위에 책임을 떠넘겨 논란에서 발을 빼려한다는 것.
김 관장은 “문화재청이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줄 몰랐다. 참여정부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린 게 문화재청”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 과정에서 한 시민단체관계자가 “참여정부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은 (국립민속박물관장·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관장님 아니냐”고 따지자 그는 버럭 화를 냈다.
‘내가 특혜를 받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강변도 빼놓지 않았다.
문화재청-MB인수위 ‘거래’의혹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입장 가운데 수장되는 문화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 같은 의견을 대변해야 하는 정부조직은 문화재보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문화재청이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한강-낙동강 물길에 지정문화재 72건과 조사대상 매장문화재 177곳이 있다고 인수위에 보고했다.
이 보고에서 문화재청은 지금의 인원으론 조사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아울러 문화재청은 박물관을 통해 조사인력을 충당, 국책사업 발굴단을 조직하겠다는 해결책을 함께 내놨다.
그러나 이를 놓고 박물관 측은 ‘문화재청이 새 정부의 경부운하건설을 측면 지원하는 대가로 박물관을 흡수하기로 한 게 아니냐’고 따져 묻고 있다.
박물관을 접수하겠다는 노골적 표현은 없지만 정부조직축소를 밀어붙이고 있는 인수위가 그 속내를 짚어냈다는 것이다.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서비스기관인 박물관은 행정업무를 맡은 문화재청과는 성격이 다르다.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박물관 쪽 주장이면엔 문화재청에게 먹힐지도 모른다는 방어본능이 작용하고 있다.
#“이왕 합쳐진다면…” 독립선언
피 튀기는 밥그릇 쟁탈전에 문화재청과 얼굴을 붉히고 있는 국립박물관은 내전까지 겹쳤다.
국립박물관이 문화재청으로 흡수·통합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한편에선 문화재청 산하조직으로서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려는 국립박물관의 기세 싸움이 한창이다.
문화재청은 인수위의 정부조직개편안에 따라 앞서 운영하고 있는 국립고궁박물관과 해양유물전시관 등 두 곳은 물론 국립중앙박물관과 11개 지방국립박물관의 운영권을 쥐게 된다.
또 가장 많은 국내·외 관람객들이 찾아 ‘장사가 잘 되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지휘권도 문화재청으로 넘어간다.
바야흐로 박물관의 ‘문화재청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이들 박물관을 어떻게 재편하느냐에 따라 각 박물관의 위상이 달라진다.
이 같은 작업의 칼자루는 모조리 문화재청이 쥐고 있다.
모든 국립박물관을 산하조직으로 둬야한다고 주장하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선 양쪽으로 전쟁을 치르는 ‘이중고’가 아닐 수 없다.
지방국립박물관과 특수박물관들은 독특한 지역특색과 주제가 실린 독자성과 자율성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중앙박물관과 맞서고 있다. 각각 다른 태생과 전통을 가진 만큼 문화재청 직속기관으로 중앙박물관과 나란히 경쟁하겠다는 것이다.
그 중 국립민속박물관이 가장 적극적이다. 민속박물관은 이번 기회에 중앙박물관을 압도하기 위한 ‘비수’를 갈고 있다.
지방국립박물관 중 전통민속만을 주제로 한 전주박물관과 섬유전문박물관인 대구박물관, 여기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운영 중인 예능민속실을 민속박물관 아
래에 두고 일원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옛 중앙박물관 터인 경복궁에 2005년 문을 연 국립고궁박물관 역시 피 튀기는 싸움에 뛰어들었다.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조선왕조 전문박물관이자 고궁관리·정책 집행까지 맡고 있는 고궁박물관은 중앙박물관과 대등한 위치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겠다는 각오다.
신안선 해저발굴 유물전시를 위해 출범한 문화재청의 해양유물전시관도 중앙박물관과 날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해양유물전시관은 지난해 ‘박물관’ 간판을 달려다 중앙박물관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접었다. 중앙박물관의 막강한 힘에 무릎을 꿇고 굴욕을 맛본 만큼 복수의 칼을 갈만 하다.
더구나 해양유물전시관은 최근 해저각지에서 고려시대 선박과 고려청자 등을 줄줄이 건져내며 눈에 띄는 성과까지 등에 업었다.
명실 공히 ‘수중고고학 전문박물관’으로 입지가 넓어진 만큼 자신감이 상당하다.
국립경주박물관도 중앙박물관의 손을 떠나기 위해 물밑작업에 한창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외적 위상이 높고 소장유물가치가 높은 만큼 경주박물관 역시 중앙박물관 밑에서 떨어져 나와 문화재청장 직속기관으로 올라서겠다는 계획이다.
한편 지난달 29일 제출된 문화재청 조직개편안엔 이들 박물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은 중앙박물관
과의 불편한 관계와는 상관없이 특별전담팀(TF)을 구성, 박물관 재편작업에 가속을 붙이고 있다.
대한민국 대표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의 위상에 적신호가 켜진 셈이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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