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범 찾은 ‘노숙소녀 살해사건’ 전말

경기도 수원의 한 고등학교. 지난해 5월 14일 새벽 허름한 차림의 김모(15)양이 옷가지에 싸인 채 발견됐다. 김양은 온몸에 검붉은 피멍이 들어있었고 머리에 큰 상처를 입어 숨을 거둔 상태였다. 처음 경찰은 노숙자 정모(29)씨와 강모(29)씨 등 20대 노숙자를 범인으로 꼽았다. 범행을 인정한 정씨는 징역 5년, 강씨는 벌금 200만원을 선고 받았다. 또 김양의 시신이 방송을 보고 경찰은 찾아온 어머니 품에 안기며 두 달여 만에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하지만 사건은 8개월 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쪽으로 급커브를 틀었다. ‘노숙소녀’를 죽인 ‘진짜’ 범인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덜미를 잡힌 것이다. 열다섯 살 소녀를 무참히 때려죽인 범인은 또래친구 5명이었다.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
처음 경찰은 신분증과 지문기록이 없는 피해자를 가출한 미성년자로 추정, 탐문수사에 나섰다. 그 결과 수원역에서 노숙자 정씨와 강씨를 피의자로 붙잡는데 성공했다.
정씨는 경찰조사에서 “같이 노숙을 하며 아는 사이였던 김양이 돈을 훔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버릇을 고쳐주려고 데려가 때렸는데 움직이지 않자 도망쳤다”고 말했다. 범행사실을 깨끗하게 인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초 수원검찰이 의외의 제보를 입수하면서 잊혀졌던 ‘노숙소녀 사건’의 진실이 드러났다.
다른 사건으로 수감됐던 제보자가 “동료 소년수에게 ‘내 친구들이 노숙소녀를 죽였다. 어른 노숙자가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갔는데 마음이 괴롭다고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한 것이다.
검찰은 관련자들을 불러 조사한 끝에 공범이 모두 5명이란 진술을 얻었다. 신원확인이 쉽지 않은 그들을 찾기 위해 검찰은 인터넷사이트를 뒤졌다.
미니홈피와 채팅사이트를 통해 용의자들 사진과 ID를 건진 수사팀은 ‘그날 밤 그 자리에 있던’ 10대 5명을 PC방에서 붙잡았다.
먼저 붙잡힌 정씨가 혼자 죄를 뒤집어 쓴 것에 대해 검찰은 “정씨는 수원역 노숙자들 사이에 ‘짱’으로 통하는 실력자였다. 특유의 서열의식과 자포자기 끝에 자백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내 2만원 훔쳤지?!”
자칫 영원히 진실이 묻힐 뻔 했던 사건은 ‘단돈 2만원’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5월 14일 새벽 2시쯤 수원역 대합실에서 가출청소년 김모(15)군과 강모(17)양 등 5명은 그곳에서 처음 만난 피해자 김양을 날카롭게 몰아세웠다.
일행 중 막내인 곽모(14)양이 노래방도우미로 일하고 받은 일당 3만원 중 2만원을 김양이 훔쳐갔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김양을 둘러싸고 수차례 폭언과 함께 추궁한 그들은 김양이 횡설수설 하며 답을 못하자 화가 폭발했다. 일행은 김양을 근처 S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끌고 갔다. 시끄러운 소리에 20대 노숙자들이 구경 삼아 모여들었다.
이틀 전에도 노숙자 김모(25·여)씨를 똑같은 구실로 흠씬 두들겨 팬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김양에게 그들의 주먹과 발길질이 무섭게 날아들었다. 구경만 하고 있던 20대 노숙자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그 자리에 끼어들었다. 10여명에게 40분 가까이 짓밟힌 김양은 곧 싸늘한 주검이 돼 버려졌다.
과연 김양이 그들의 돈을 훔쳤을까. 물론 아니었다. 소녀가 어눌하게 답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김양은 지적능력이 떨어지는데다 눈까지 안 보이는 장애인이었다.
방송 나와 출연료도 챙겨
더욱 충격적인 것은 김양의 안타까운 사연을 방송한 SBS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 이들 가해자들이 출연,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피해자의 사진이 실린 전단을 보고도 “전혀 모르는 애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고 인터뷰했다. 방송 뒤엔 출연료조로 제작진으로부터 돈까지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김양을 해친 뒤 이들 중 2명은 빈집털이와 차털이로 나서 절도범 신세가 됐다.
또 다른 한명도 특수절도혐의를 받고 소년분류심사원에 수용됐다.
검찰은 사건브리핑에서 “붙잡힌 10대 중 한명은 조사 중 종이컵 뒷면에 ‘15세 (피해자)님 미안합니다’는 글을 적기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이 또래 피해자를 고문에 가까울 정도로 잔인하게 때릴 수 있다는 사실에 수사팀도 심히 당혹스럽다”고 덧붙였다.
8개월 만에 한 푼 ‘노숙소녀’
수원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김한석 부장검사)는 가해청소년 5명 중 김모(15)군, 조모(15)양 등 3명을 구속기소하고 다른 사건으로 구속된 최모(18)군은 불구속기소했다. 또 형사미성년자인 곽모(14)양은 수원지법 소년부에 송치했다.
수사 내내 김양은 이름 대신 ‘노숙소녀’로 불렸다.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신원미상의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김양이 싸늘한 주검이나마 부모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은 안타까운 사연이 방송전파를 탄 순간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두달 만인 지난해 7월 SBS-TV ‘그것이 알고 싶다’ 예고편을 본 김양의 어머니가 경찰에 찾아온 것이다.
결국 김양의 시신은 DNA(유전자) 확인과정을 거쳐 51일 만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김양의 어머니는 남편과 이혼하고 딸과 살고 있었다. 김양은 중1 때부터 수시로 집을 나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김양 어머니는 생떼 같은 딸을 잃었지만 변변한 보상조차 받을 수 없었다. 가해자들이 보상금을 낼 형편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일정한 직업도 없어 생활고에 시달리는 어머니의 딱한 사정에 수사팀이 나섰다.
검찰은 범죄피해자구조법, 범죄피해자보호법 등 관련법규에 따라 김양 어머니에게 보상금이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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