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로 붕괴된 숭례문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10일 밤 불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긴급 출동한 소방당국은 6시간여 동안 진화작업을 벌였으나 붕괴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경찰은 방화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정확한 화재원인을 조사하는 한편 방화범으로 보이는 용의자를 찾아내는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숭례문 경비를 맡고 있는 KT텔레캅은 10일 밤 8시 47분쯤 침입경보가 발령됐다고 밝혔다.
KT텔레캅에 따르면 숭례문에 모두 6개의 적외선 감지센서가 작동되고 있으며 8시 47분쯤 경보가 울려 보안요원을 출동시켰다. KT텔레캅은 센서가 설치돼 있어 1층에 침입이 있을 땐 곧바로 경보가 울린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번 불은 방화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숭례문에 들어간 방화용의자를 본 목격자도 있어 방화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그러나 숭례문주변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엔 방화용의자 모습이 잡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져 용의자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용의자가 왜 감시카메라에 찍히지 않았는지 의문으로 남는다.
최이태 문화재청 안전과장에 따르면 숭례문 주변엔 교통관측 및 문화재관리용으로 CCTV가 여러 대 설치돼 있다. 이 CCTV는 사각(死角)이 없도록 돼 있어 화재 직전 누군가 접근했다면 그 모습이 잡혀야 한다.
또 숭례문 옆면 계단을 이용하거나 벽을 타고 올라갔을 땐 확인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는 게 최 과장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방화용의자가 카메라에 찍힌 장면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번 불은 방화가 아닌 관리 소홀에 따른 것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숭례문 안을 찍는 CCTV는 설치돼 있지 않아 정확한 화재원인을 밝히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사설보안업체의 허술한 관리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KT텔레캅은 직원 한 명이 일주일에 5번 쯤 숭례문 근처를 순찰해왔다. 하지만 새벽에만 보안점검을 해 불이 일어난 밤 9시쯤엔 외부인 출입을 막을 수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외부인 침입경보를 받고도 출동은 10여 분이 지난 뒤에야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관할 경찰서와 소방서에 통보조차 하지 않아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KT텔레캅 측은 “무료로 관리를 해주고 있지만 허술하게 관리해오지는 않았다”고 해명했다.
어처구니없는 불로 국보 1호가 무너지자 문화재청에 대한 비난도 거세다. 수원 화성 등 다른 문화재 화재사건을 계기로 숭례문 관리를 보강,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으나 관리를 맡은 문화재청과 서울시 중구청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지난해엔 숭례문의 관리책임이 제기된 적도 있다.
숭례문 일부가 파손된 채로 방치돼 관리부실문제가 부각되자 양쪽은 책임공방을 벌이기에 바빴다.
이런 태도는 결국 불이 났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당국은 목재건축물임을 감안, 진화요령에 따라 기왓장 등 일부를 헐고 불을 끄려했다. 하지만 이때 문화재청이 제동을 걸었다. 숭례문이 국보 1호여서 화재진압에 신중을 꾀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문화재청은 숭례문이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일반불과 같은 형식으로 진화하면 훼손우려가 높다고 해체를 망설였다. 이 바람에 소방당국의 적극적인 진화가 늦어졌고 결국 숭례문이 무너졌다.
게다가 화재예방 기본 장치인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은 것에 대해 문화재청은 숭례문이 도심에서 1분 안에 출동이 가능한 곳에 있고 목조건물이라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았다 변명하고 있다.
#국보 1호 숭례문은…
화마로 무너진 숭례문(남대문 / 연면적 177㎡의 2층)은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1962년 12월 국보 1호로 지정, 명실상부하게 국내 대표 문화재로 자리매김해 왔다.
여덟 개 도성 관문 중 가장 중요한 정문인 숭례문은 국내 성문 건물로서도 최대규모를 자랑했다. 임진왜란 때 성 안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몇 채 남지 않은 건물 중 하나로 조선 전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살렸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숭례문은 조선왕조가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수도를 옮긴 뒤인 1395년(태조 4년)에 한성 남쪽 목멱산(木覓山·남산)의 성곽과 만나는 곳에 짓기 시작, 3년 만에 완공됐다. 이후 조선왕조를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는 6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몇 번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의 건물은 1447년(세종 29년)에 고쳐 지은 것으로 1961~1963년에 대규모 보수공사를 통해 해체된 채로 수리되기도 했다.
숭례문의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위해 양녕대군이 썼다고 ‘지봉유설(芝峯類說)’을 통해 전해진다. 한편으론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당대 명필이었던 안평대군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 땐 서울 성곽이 동쪽으로 남산에서 내려와 현재 서울역 건너 힐튼호텔 앞을 지나 숭례문에 연결돼 있었다. 서쪽으론 서소문부터 대한상공회의소 앞을 지난 성벽이 숭례문에 직접 이어져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도성에 드나들 수 없었다.
그러나 광무 3년(1899년) 서울시내 전차노선공사와 개통으로 동대문과 서대문이 헐리면서 본격적인 훼손이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땐 더 심한 몸살을 앓았다. 1907년 일본군부가 연결된 성곽을 허물고 도로를 내면서 섬처럼 고립됐던 숭례문은 2005년 5월 숭례문광장이 만들어져 옛 모습을 되찾는 듯했다. 그 뒤 2006년 3월 100년 만에 일반인에게 개방돼 숭례문은 국민 곁으로 돌아왔지만 불과 2년 만에 참극을 맞았다. 숭례문 개방시간은 오후 8시까지로 제한돼 있다. 불이 난 2층 문루는 일반인들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다.
610년 간 임진왜란과 일제침략 등 숱한 고난을 견딘 숭례문이 불과 4시간 만에 잿더미로 바뀐 것이다.
윤지환 기자 jjh@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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