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난 의료계가 투혼의 불꽃 찬물 끼얹다

마지막 투혼을 불태운 진정한 프로복서 최요삼(34·주몽담배)이 지난 3일 자정 결국 숨졌다. 지난 12월 25일 경기 중 뇌출혈로 의식을 잃은지 열흘 만이다.
최요삼의 가족은 평소 본인 뜻에 따라 장기기증을 결정했고 심장, 간, 각막 등을 적출해 6명의 말기환자에게 전했다. 한국 권투의 마지막 불씨를 살리려던 그는 혈관과 피부조직까지 내놓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놓고 여러 의혹들이 불거지고 있다. 프로복싱 전 세계챔피언 홍수환(58)씨가 최요삼의 응급처치를 문제 삼아 책임을 묻겠다고 나서 논란에 불을 지폈다. 그가 제기한 의혹과 책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요삼이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
최근 전 세계챔피언 출신을 주축으로 한국권투인연합회를 발족한 홍수환 씨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울분을 토했다. 그는 “응급처치만 제대로 했어도 요삼이는 살 수 있었다. 기본이 안된 사람들이 미숙하게 대처해 이 지경까지 온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증거는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많다고 했다.
먼저 최요삼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뇌에 산소공급을 위한 산소호흡기가 없었고 구급차가 주차장에 발이 묶여 20분이나 늦어졌다는 것이다.
홍씨의 주장에 의료계 종사자들도 상당수 공감하고 있다.
최요삼은 경기 전 보양식으로 먹은 개소주의 부작용과 감기몸살, 극심한 체중조절 등으로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경기에 나서는 선수의 건강상태를 체크, 사고를 막을 목적으로 들여온 메디컬 테스트에서 ‘정상’ 판정을 받았다. 마지막 안전장치마저 그를 버린 것이다.
탈진해도 메디컬테스트는 ‘정상’
최요삼의 지인들은 “요삼이가 경기 한 달 전부터 개소주를 먹다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호소했다”고 말했다. 약을 처방한 한의사는 지난달 31일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처방 없이 보약을 먹다 몸이 망가진 상태였다. 보름동안 직접 처방해준 약을 먹고 컨디션을 회복했지만
경기 일주일을 앞두고 체중을 급격히 줄이면서 몸이 버티지 못한 것 같다”고 전했다.
하지만 경기 당일 메디컬테스트는 아무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경기 직전 현장에서 메디컬테스트를 담당한 순천향대학병원은 “규정대로 감기는 걸리지 않았는지, 컨디션은 정상인지 물어보고 혈압과 맥
박을 쟀다”고 말했다. 감기몸살에 시달리며 경기 당일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그는 결국 탈진한 상태로 링에 오른 것이다.
“왜 가까운 곳 놔두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도 최요삼은 챔피언벨트를 지켜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잃은 그를 병원으로 옮기는 과정도 석연치 않았다.
그의 지인들에 따르면 구급차가 세워진 주차장엔 사이드브레이크까지 채워진 5~6대의 차가 길목을 막고 있었다. 최요삼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데만 20분을 보낸 셈이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행사 주최 측이 사고를 키운 책임이 있다.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우물쭈물 하는 사이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나 같다”고 꼬집었다.
또 경기장에서 가까운 서울아산병원이나 건국대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거리가 많이 떨어진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학병원까지 ‘먼 길을 돌아간’것에 대해서 원망의 목소리가 크다. 구급차에서도 ‘가까운 병원으로 가자’는 지인들 의사를 무시하고 한남동 행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순천향대병원은 사건이 커지자 적극 해명에 나섰다.
병원은 “그 때 응급처치를 한 정형외과 레지던트가 소속된 병원으로 가는 게 의사소통이 잘 돼 더 빠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밝혔다. 또 “CT검사결과 워낙 뇌출혈이 심해 10~20분 빨랐다고 사태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또 다른 전문가의 생각은 다르다. 한 외과전문의는 “의식을 잃은 환자라면 먼저 기도를 확보하고 뇌압을 낮추는 약물을 투여해 시설과 장비를 갖춘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옮기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환자가 치료를 받기까지 시간이 늦어졌다면 어떻게든 악영향이 있었을 것이란 입장이다.
만약 순천향대병원이 환자를 옮기는데 시간을 지체했다 해도 현행법을 어긴 것은 아니다. 응급의료법상 환자를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조항은 없기 때문이다.
구급차 안에서 당연히 작동됐어야할 산소호흡기가 멈추고 기본약물도 갖춰지지 않은 것 등도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병원의 윤리적 책임 외엔 마땅한 규제법조차 없다.
홍수환 “책임자 색출할 것”
전 세계챔피언 30여명이 참여해 발족한 한국권투인연합 회장을 맡은 홍수환씨는 이번 사건의 원인제공자를 찾아 엄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씨는 “의식을 잃은 권투선수에게 그 쌀쌀한 날 담요 한 장 덮어주지 않고 무슨 응급처치를 했다는 거냐. 뇌출혈로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상황에서 지정병원이 다 무슨 소용인가. 관계자들이 병원 도착시간까지 속여 책임을 피하려고만 한다”며 맹비난했다.
한국권투인연합회는 이번 최요삼의 부실했던 응급처치문제와 함께 한국권투위원회(KBC)가 관리하는 건강보험금 전용 논란에 대한 책임도 밝히겠다는 입장이다.
홍씨는 인터뷰를 통해 “응급처치를 소홀히 한 주최 쪽, 병원, 선수들이 모은 건강보험금을 축낸 전·현직 권투위원회 인사들에게 엄한 책임을 물어 제2의 최요삼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최요삼의 가족들은 논란을 키우고 싶지 않다는 입장이다. 최요삼의 친동생이자 매니저인 최경호씨는 한 언론을 통해 “솔직히 그냥 묻어두고 싶다”고 말했다.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매사 완벽했던 최요삼의 마지막 모습에 혹시라도 누가 될까 싶어서다.
최씨는 “순천향병원도 최선을 다했다. 의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은 밝혀지겠지만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확대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덧붙여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병원이 환자 목숨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본원칙을 잊지 말아줬으면 한다”며 뼈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한편 지난 5일 발인을 거쳐 권투인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진 최요삼에게 1982년 김득구 선수가 받은 체육훈장 백마장이 추서됐다.
#‘최요삼 병원비’ 좀 먹은 권투위 경찰조사
마지막 사투를 벌이던 최요삼의 병원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울 만큼 한국권투위원회(KBC)의 건강보호기금(건보금)은 바닥난 상태였다. 이 가운데 권투위원회 전직 간부 등이 건보금을 가로챈 정황이 포착, 경찰이 조사에 나섰다.
지난 3일 서울 도봉경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한국권투위원회 전 사무총장 이모씨와 전 총무부장 장모씨 등이 건보금 5천1백여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경찰에 고소당했다. 경찰은 두 차례에 걸쳐 고소인 조서를 받았고 장씨가 경찰에 출석하겠다는 뜻을 밝힘에 따라 이번 주부터 본격 수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프로복싱계는 경기가 열릴 때마다 대전료의 1%씩을 모아 경기 중 불의의 사고로 다친 선수들 치료비 명목으로 건보금을 모아왔다.
하지만 최근 전직간부들의 기금횡령 의혹이 불거진 것. 권투위원회는 이씨 등을 경찰에 고발하는 한편 최요삼 선수의 병원비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도 벌여왔다.
경찰 관계자는 “일단 피고소인에 대한 조사가 시작돼야 횡령혐의에 대한 수사를 할 수 있다. 피고소인이 지방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이번 주에 수사를 본격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수>
##‘아름다운 챔프’… 아낌없이 다 줬다
자정을 갓 넘긴 지난 3일 새벽 0시1분. 심장의 대동맥이 끊기며 최요삼은 눈을 감았다.
4시간여에 걸친 장기적출수술 끝에 챔프의 폐, 간, 심장과 각막 등이 꺼져가던 여섯 생명의 불을 밝히는데 쓰여졌다. 그의 심장은 36살 여성환자에게 이식됐고 수술은 3일 아침 6시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병원 쪽은 최요삼이 장기와 함께 혈관, 연골, 심장판막도 기증해 앞으로 수 십 명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동생 최경호씨는 “평소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형의 뜻이다. 다 주고 떠난다. 형의 몸 일부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면 그 사람들을 통해서 형은 이 세상 어딘가에 사는 거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는 덧붙여 “마지막 순간에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아낌없이 베풀고 간 형은 결국 인생의 승리자”라고 말해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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