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지난달 28일 경찰과 그 정보원이 계략을 짜서 전과자에게 접근, 교묘하게 마약을 사도록 유인해 체포한 행위는 위법한 ‘함정 수사’이므로 기소 자체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의 이 같은 판결로 경찰의 함정수사가 주목을 끌자 새삼 함정수사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날 법정에 선 피고 김모(33)씨는 마약 전과가 있는 인물로, 마음을 다잡고 딸을 키우기 위해 야채 행상을 하며 나름대로 성실히 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마약을 이용한 함정수사에 걸려 그만 쇠고랑을 차게 된 것이었다.
인권단체에 접수된 민원이나 등을 살펴보면 함정수사에 걸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거나 곤혹을 치른 이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특히 전과자들의 경우 함정수사에 단골 타깃이 되기 일쑤다. 경찰이 함정수사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확실한 심증을 뒷받침할 물증이 없을 때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경찰이 함정수사를 가장 많이 하는 때는 특별단속 기간 등 실적을 채워야 할 때라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이때는 아무리 새 삶을 살고 있어도 전과자라는 이유만으로 경찰의 집요한 추적에 시달린다.
일반인들에게는 경찰의 함정수사 기법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피해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기상천회 한 수사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경찰의 황당한 함정수사는 어떤 것이 있을까. 피해자들이 전하는 함정수사 실태를 취재해 보았다.
“철없던 시절 한순간의 실수로 절도전과를 남기게 됐다. 그런데 얼마 전 취객이 길가에 누워 있기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지갑이 그의 옆에 떨어져 있었다. 그 지갑을 주워 펼쳐보는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형사 두 명이 현행범으로 나를 체포하겠다고 말했다.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절도전과자라는 이유로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
지난 9월 경찰의 함정수사에 걸려 현재 조사를 받고 있다는 박모(36)씨의 사연이다. 박씨는 현재 농산물 직거래 유통센터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두 살배기 딸아이의 아빠다. 그런 그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 바람에 현재 직장생활도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박씨가 경찰로부터 타깃에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박씨는 “수년전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이후 길에서 경찰만 보면 아무런 죄가 없어도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이라며 “사소한 문제가 생겨도 경찰서에서 불이익을 당한 적이 많았다”고 털어 놓았다.
또 그는 “절도범 일제 단속이나 절도사건 정리기간에는 어김없이 경찰이 찾아왔다”며 “만나기 싫어 피하거나 하면 직장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전과 사실이 드러나도 좋으냐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곤 했다”고 말했다.
경찰의 함정수사에 걸려 피해를 봤다는 이들이 전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대부분 박씨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합법적인 함정수사도 있어
형법상 함정수사는 크게 ‘기회 제공형 함정수사’와 ‘범의 유발형 함정수사’로 분류된다.
기회 제공형 함정수사는 예컨대, 마약을 팔려고 시도 중인 마약상에게 경찰이 그 신분을 위장한 채 접근했다가 범인이 마약을 팔려고 물건을 꺼내 흥정하는 순간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또 범의 유발형 함정수사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살고 있던 절도전과가 있는 노숙자에게 접근하여 함께 절도범행을 저지를 것을 제의하고 그 제안에 승낙하는 노숙자가 실제로 범행을 저지르기를 기다렸다가 범행을 하는 순간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경우가 그 예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기회 제공형’은 적법한 수사로 인정하는 반면 ‘범의 유발형’은 위법한 수사로 해석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대법원 판례를 살펴보면 범의를 유발한 경우만 함정수사로 이해한다. 또한 판례상으로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기회 제공형’이 위법은 아니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범의 제공형 함정수사가 만연해 있고 여기에 걸려들 경우 법정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데 있다.
부산에 거주하는 김모(34)씨는 “마취 크림 등과 같은 성 보조 제품을 파는 과정에서 향정신정성의약품 관리법에 저촉되는 약물을 모르고 팔다가 경찰에 단속된 적이 있다”며 “그때 이후로 졸지에 마약사범이 돼 당국의 감시를 받다가 수개월 전 함정수사에 걸려
곤혹을 치렀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친구를 통해 알게 됐다며 접근한 한 여성이 남편과의 부부관계 때문에 약이 필요하다고 간절히 부탁해 어쩔 수 없이 약을 구해 줬는데,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후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이 일로 김씨는 신경이 쓰여 일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운 속내를 털어놨다.
또 김씨는 “절대 돈을 벌려고 약을 구해 준 것이 아니다”며 “하지만 이런 주장을 아무리 해 봤자 애초 전과자라는 이유로 내 말을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변호사조차 이럴 경우엔 경찰 조사에 최대한 협조하면서 죄를 가볍게 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며 한숨을 내 쉬었다.
이처럼 함정수사에 걸린 피해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함정수사는 한 개인의 인생을 180도 바꿀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마음 다잡고 사는 한 가장의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함정수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경찰 “영악한 범죄꾼 위한 것”
이에 대해 베테랑 강력계 형사로 이름을 날리다 지난 2000년 4월 ○○경찰서에서 퇴직한 최모(58)씨는 경찰의 함정 수사에 대해 “사람은 누구나 다 범죄자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성향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특히 전과자가 그런 색채가 강하다고 보고 우리(경찰)는 그들의 재범 여부를 신중히 관찰한다”며 “내 입장에서 보면 경찰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함정수사를 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최씨는 “일반인들이야 모르니까 실적 때문에 생사람 잡는다고 하지만 솔직히 실적 쌓으려고 치면 잡아넣을 잡범들 수없이 많다”며 “경찰의 함정수사는 수사상 매우 부득이한 경우에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범죄자들이 영악해져서 좀처럼 꼬리를 밟히지 않고 도망다니기 때문에 일종의 덫을 설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윤지환 jjh@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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