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급 문화재만 털어온 한국판 ‘오션스 14’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 10월 24일 전국의 향교, 고택, 박물관 등에서 보물급 문화재 등 3000여 점을 훔쳐 판매한 혐의로 김모(남·44)씨 등 6명을 구속하고 8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또한 이들 문화재를 시중에 유통시킨 장물아비 2명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중이다. 한편 훔친 문화재로는 미술학계에서도 최고로 친다는 곽분양행락도를 비롯해 겸재 정선의 산수화, 운보 김기창 화백의 청옥산수 연작 등 가치 있는 ‘보물’급이 다수 포함됐다. 잠복과 미행 을 통한 경찰의 2년간 끈질긴 추적으로 붙잡힌 ‘통 큰 사냥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경찰에 따르면 일당은 2005년 9월 진양 하씨의 담산고택에 몰래 들어가 경남유형문화재 409호인 필사본과 언문철등을 가져와 장물업자에게 팔아넘기는 등 2005년 2월부터 올해 6월까지 100여개 고택, 향교, 종가에서 절도행각을 벌였다.
도난 물품만 3000점, 회수된 물품이 2100점에 달하는 이번 사건에, 문화재청 관계자는 “도난 문화재의 양과 범죄 횟수로 볼 때 역대 최대”라며 “회수된 양도 역대 최다”라고 말했다.
영화처럼 배역도 철저
지난 6월 일당 중 가장 먼저 붙잡힌 김모(44)씨가 ‘보물 사냥꾼’의 실질적 리더였다. 고미술품 전문 취급업자로 일하던 김씨의 식견은 전문가 못지않았다. 전국의 고택과 향교를 돌며 멤버들이 훔칠 물건을 점찍어 놓는 것(일명 ‘물주기’)이 리더 김씨의 역할.
그와 함께 조직의 참모장 격을 맡은 것은 정모(62)씨로 역시 문화재에 식견이 있는 그는 20여년의 빈집털이 경력(?)을 앞세워 구체적인 절도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범행 현장을 진두지휘 한 것은 역시 빈집털이 전문인 우모(50)씨.
우씨는 자신의 매제까지 동원해 현장에 침입, ‘붕어(가치가 덜한 물품)’부터 ‘잉어(가치가 큰 보물급)’까지 닥치는 대로 문화재를 훔쳐 김씨와 정씨에게 넘겼다. 범행 규모에 따라 가담하는 인원은 2명에서 6명까지 변화무쌍했다.
이들 세 사람은 청송교도소 동기로 만난 사이였다. 2005년 초 김씨와 우씨가 출소 후 만나 ‘전국구 범행’을 모의했고 같은 해 4월, 베테랑 정씨가 가담한 것. 핵심멤버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검거된 정씨는 치밀한 행적으로 경찰의 추적을 따돌렸다.
대중교통 이동·대포폰 사용
경찰을 애먹인 것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이들의 행적이었다. 이미 전과가 있는 용의자들은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지만 확실한 물증과 행적이 묘연했다. 2년 전 사건을 접수받은 경찰은 전담팀을 조직해 실마리를 풀어갔다.
단순 절도 혐의로 수감된 윤모(32)씨가 이들 문화재 절도에도 가담했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막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그를 그 자리에서 체포해 범행을 자백 받았다. 이를 근거로 핵심 멤버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경찰은 전국에 걸쳐 몇 달간 잠복에 들어갔다.
용의자들이 대포폰을 사용하는데다 자가용이 아닌 고속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것을 알아낸 경찰은 각 여객 터미널에도 미행을 붙여 2년간 추적한 끝에 지난달 24일 정씨를 포함한 일당 6명과 단순가담자 8명을 검거하는데 성공했다.
20년 경력의 ‘베테랑 도둑’으로 일당의 좌장격인 정씨는 공공연히 “경찰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나는 못잡는다”며 배짱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회수 못한 900여점 행방은?
이들이 훔친 3000여점 중 현재 회수된 것은 2100여점. 경찰은 인터넷 경매사이트인 코베이 등을 통해 못 찾은 일부가 유통됐을 것으로 보고 대조중이지만 여의치 않다. 더구나 정씨를 비롯한 핵심 용의자가 어디에 무엇을 팔았는지 일절 함구하고 있다.
장물아비를 통해 골동품 가게나 수집상에게 팔리는 경우 용의자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많아야 1인당 100만원. 대부분은 건당 2,30만원에 그친다. 이들이 겨우 적은 수익을 위해 치밀하게 범행할 리 없다는 게 경찰 관계자의 말이다.
경찰은 또 “검거된 일당이 학계나 재벌가와 ‘비밀리에’ 거래를 한 경우 추적이 쉽지 않지만 갖고만 있어도 가치가 높아지는 문화재이니 만큼 그들의 금고를 여는 것이 이번 사건의 큰 숙제”라고 덧붙였다.
#문화재 절도, 헤어날 수 없는 늪?
14명의 대규모 절도단을 붙잡은 경찰이지만 끝난 것이 아니다.
수년 전부터 전담팀을 구성해 수사를 펼쳐온 담당 경찰은 “2005년에 검거됐던 다른 일당이 최근 출소했다”면서 “그들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를 정보원을 통해 입수해 다시 수사에 착수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한번 이 세계에 발을 담그면 경찰에 블랙리스트가 올라오고 감시를 받으면서도 계속 범행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출소한 전과자들이 사회 적응에 실패하는 것도 이유지만 문화재 관리의 허술함과 생각지 못한 ‘대박’을 건질 확률도 커 또 다른 사건을 부른다고 그 관계자는 지적했다.
이수영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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