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인 지난 9월 25일 오후 2시 40분경 보성경찰서에 한통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걸어온 30대 여성은 경찰에 “관광객으로 보이는 20대 여성으로부터 구조를 요청하는 내용의 문자가 왔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 같다”고 신고했다.
70대 노인의 ‘보성연쇄살인’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여성은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보성을 방문한 여행객이었다. 함께 여행 온 자신의 남편과 길이 엇갈린 이 여성은 우연히 만난 피해자들 중 한명에게 핸드폰을 빌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남편을 만나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휴대폰을 빌려 썼던 피해자로부터 이상한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남편의 휴대폰으로 전송된 메시지 내용은 “배를 타다 갇힌 것 같다며 경찰보트 좀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이를 본 여성은 아무래도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이 신고를 접수한 그 시각, 이미 문자 메시지의 발신인은 이미 노인에 의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한편의 공포스릴러 영화와 같은 보성연쇄살인사건 전모를 자세히 취재해 보았다.
경찰은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보성에 거주하는 70대 노인 오모(70)씨라고 지난 1일 밝혔다. 당초 경찰은 살해된 이들 모두 건장한 20대 젊은이들이라는 점을 감안, 두 명 이상의 30대에서 40대 남성이 공모해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왜소한 70대 노인이 엽기적인 연쇄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 경찰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경찰수사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오씨는 두 차례에 걸쳐 한 번에 두 명씩, 모두 4명을 끔찍하게 살해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피해자들 가운데 한명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 모두 여성들이라지만 백발이 성성한 70대 노인에게 건장한 20대 젊은이들이 어떻게 그토록 허무하게 당할 수 있었던 것일까.
경찰 관계자는 이에 대해 “오씨는 노인이라고는 하지만 반평생 동안 거친 바닷가 일에 단련된 사람이다”며 “힘든 노동에 단련돼 있기 때문에 보기에는 깡말라 힘없어 보여도 실은 왠만한 청년도 그 힘을 당해내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또 흔들리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연약한 여성들이 오씨를 당해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경찰은 추측하고 있다.
과학수사가 사건 해결 단초
이번 사건의 해결에도 과학수사가 결정적인 도우미 역할을 했다.
한 여성으로부터 사건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추석명절의 휴식을 뒤로한 채 직원을 비상소집해 피해자들이 배를 탄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비롯해 해안가에 대한 수색과 더불어 통신수사를 실시했다. 참담한 결과가 드러나는 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신고접수 다음날인 9월 26일 오전 8시 25분경 전남 보성군 회천면 율포항 선착장 앞 900여 미터 해상에서 실종된 조모(24, 여, 경기 시흥)씨가 숨져 있는 것을 김모씨가 발견, 해경에 신고했다.
경찰이 의사와 합동으로 검안한 바에 따르면 경부 압박흔적이 발견되고 신체 여러 군데 상처가 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타살로 의심한 경찰은 피해자들을 승선시킨 사람을 찾기 위해 관내 335대의 선박에 대해 사건당일 출항여부와 알리바이를 면밀히 추적했다.
경찰은 이 과정에서 한 선박이 무등록이며 오전과 오후 정박위치가 상이함을 알아내고 이 선박의 소유주를 파악했다. 그가 바로 오씨였다.
또 신고자인 30대 여성에게 구조요청 문자 메시지를 보낸 후 친구 조씨와 함께 실종된 안모(23.여)씨는 28일 새벽 보성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안씨의 사체에도 조씨와 같이 저항의 흔적이 있고 예리한 도구에 찔린 상처 등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동일범의
소행으로 경찰은 파악한 경찰은 오씨를 집중 추궁했다.
사건 초기 오리발을 내밀던 오씨가 자백하게 된 것은 과학수사를 통한 명명백백한 검사결과 때문이었다. 오씨의 선박에서 발견된 모든 증거물들이 피해자의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 진술에서 오씨는 잘못을 뉘우치기보다 자신의 죄를 숨기기에 급급했다”며 “증거물에 대한 새로운 검사 결과가 나올 때 마다 계속 진술을 번복했기 때문에 열 번도 넘는 신문 끝에 겨우 자백을 받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피해자 잔인하게 살해
이에 앞서 오씨는 지난 8월 31일경 대학생 김모씨(21)와 추모씨(20·여)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일반인들이 상상하기조차 힘든 잔인성을 드러낸 것으로 경찰 조사결과 밝혀졌다.
오씨는 연인인 두 사람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가 추씨를 성추행하기 위해 김씨부터 제거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김씨를 물에 빠뜨린 뒤 삿갓대(끝이 뾰족한 창같은 도구)로 찔러 죽인 오씨는 완전 무방비상태에 놓인 추씨를 성추행하려 했다. 하지만 추씨가 완강히 저항하자 인정사정없이 추씨를 바다 속으로 던져 넣었던 것이다.
경찰은 “오씨가 경찰 진술에서 ‘같이 죽어 버려라’라고 외치며 추씨를 물에 밀어 넣었다고 진술했다”며 “이어 배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추씨 역시 삿갓대로 찔러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전했다.
한편 그의 범행이 세상에 드러나자 그동안 여수, 고흥, 보성 등 해안에서 발생한 의문의 사망사건들도 오씨의 범행일 가능성이 크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밖에 오씨는 평소에도 이런저런 범죄를 저질러 주위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문제 노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씨는 불법어로 6차례와 폭행 1차례의 전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린 시절부터 어업에 종사해온 보성군 회천면 우암마을에 살다 12년전 보성읍으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부인과 둘이 살고 있는 오씨는 50대의 장녀 등 2남5녀의 자녀를 두고 있으며, 10여명의 손자가 있다.
윤지환 jjh@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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