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업자와 경찰관이 부부라는 영화같은 가정이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지난 5일 경기 광명경찰서에 따르면 전직 경찰 출신 임 모(64)씨가 사채업을 하는 아내의 빚을 받기 위해 채무자 가족에게 흉기를 휘둘러 1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상해를 입혔다고 밝혔다. 사채업자 아내와 전직 경찰 출신 남편의 공생관계가 현실에서는 비극으로 나타난 것. 다행스러운 점은 만약 경찰이 임씨를 조기에 검거하지 못했다면 이번 사건은 자칫 연쇄 살인 사건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어서 임 씨의 검거는 경찰 관계자들에게 안도의 한숨을 짓게 했다. 사채업자인 아내에게 돈을 빌려간 사람들을 찾아 빚을 받아내는 해결사 역할을 해 온 전직 경찰 출신 임씨가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된 사건을 추적해봤다.
지난 2001년까지 서초경찰서에서 경사로 재직한 임씨는 재직 중이던 지난 98년경부터 사채업을 하는 아내를 도와 채무자로부터 빚을 받아내는 일을 해왔다.
경찰에 따르면 아내가 하던 사채업은 시중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대규모 사채업이라기보다는 몇몇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얼마만큼의 이자를 받는 형태의 소규모 사채업이었다.
현직 경찰관이란 신분 탓에 채무상환을 독촉하는 일에 조심스러웠던 임씨는 정년퇴임으로 경찰이란 ‘굴레’를 벗어던진 후 보다 적극적으로 아내의 일을 도왔다.
그러나 빚을 받아내는 일은 예정처럼 진행되지 못했고 결국 돌려받지 못한 돈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이에 임씨 부부의 생활도 급속도로 어려워져 갔다. 이들은 그들 소유의 집까지 팔면서 생계를 유지해 갔으나 5억원에 이르는 돈을 돌려받지 못하면서 결국 파산상태에 이르게 됐다. 생활고가 원인이 돼 급기야 이들 부부는 올해 초 이혼서류에 도장까지 찍게 됐으며 이는 임씨에게 크나큰 좌절감을 가져다줬다.
어쩌면 이들 부부에게 이혼은 빌려준 돈이 상환되지 않자 사업상 심한 경제적인 압박을 느꼈던 아내와 빚을 받아내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했던 남편이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당연한 결과였던 셈이다.
사건은 여기서부터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30년의 경찰생활의 결과물이라고 여겨왔던 집까지 날려버린 임씨는 ‘이혼남’의 신세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비참하게 생각하고 돈을 갚지 않은 채무자들에게 앙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후 임씨는 채무자 13명의 이름과 주소, 채무액 등을 적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이들에게 살해위협을 가했다.
돈 받지 못하자 앙심품어
이혼 이후 이런 생활을 반복해오던 임씨의 범행은 결국 지난달 10일 벌어졌다.
임씨는 자신에게 1000만원(임씨는 5000만원 주장)의 빚을 진 A씨를 찾아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위치한 A씨의 사위 최 모씨의 집을 찾아갔다. 그 집에서 A씨를 만나지 못한 임 씨는 최 씨에게 “A씨를 어디다 숨겼냐”며 따지기 시작했고 다툼 끝에 흉기를 휘둘러 최씨를 살해했고 다툼을 말리던 최씨의 아내에게도 중상을 입혔다.
임씨의 범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또 다른 채무자인 유 모(46)씨를 찾아 방배동으로 갔고 결국 임씨는 유씨에게도 흉기를 휘둘러 상해를 입혔다.
이미 저지른 일을 돌이킬 수는 없는 법.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임씨는 경기도 일대의 숙박업소를 전전하며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숨어 지냈다. 30년간 경찰생활을 한 그였다. 경찰이 어떤 식으로 수사망을 좁혀올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임씨의 행적을 추적해 온 방배경찰서 수사팀들은 서울 신정동에 있던 임씨의 전세방에서 발견한 채무자들 관련 사항을 중심으로 임씨의 행적을 파악했고 지난 3일 오후 10시 25분경 경기도 의정부시내의 모 숙박업소에서 임씨를 검거했다.
이미 살인을 저지른데다 경제적으로도 최악의 궁지에 몰렸던 임씨의 형편상, 그가 조기에 검거되지 않았다면 채무자들 중 제3, 4의 피해자가 발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도 일찌감치 임씨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임씨의 집에서 채무자 명단이 적힌 종이를 발견한 후 그가 검거될 때까지 명단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의 신변을 보호해왔다.
임씨는 경찰에서 “30여년 경찰 생활 끝에 마련한 집까지 팔아 아내의 사채업에 보탰는데 채무자들이 원금 5억원이라는 큰돈을 갚지 않아 앙심을 품게 됐다”고 진술했으며 자신의 범행을 모두 인정했다.
이번 사건의 수사본부가 차려졌던 광명경찰서 강력 5팀의 조성우 형사는 “당일 범행이 계획적이지는 않았고 다툼 끝에 일어난 우발적 범행”이라며 “재직 당시 현직 경찰관이란 점을 이용해 채무를 받아낸 적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아내의 일을 돕던 남편은 ‘살인’이라는 한 순간의 실수로 수감생활을 시작하게 됐으며 30년 경찰생활의 공든 탑도 한 순간의 실수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박혁진 phj1977@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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