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선거에 세월호 이용하려는 野 반성해야
지난 9월의 마지막 날 쫓기듯이 세월호특별법에 대한 여야 간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날 밤에 통과시키려고 준비하고 있던 90건의 안건처리를 위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세월호특별법을 희생한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은 이러한 여야당 합의에 대해 즉각 거부의사를 밝혔다. 실제로 양당이 합의한 내용을 보면 별 것도 아니다. 여기저기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이유다. 박영선 원내대표가 법안처리 ‘0’건 이라는 언론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갖혀 또다시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친 것이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은 10월 2일 비대위 회의에서 “우리 당이 협상에서 졌다. 패배를 인정한다.”고 했다.
세월호특별법 합의 하루 만에 영화인들이 나섰다. 감히 국민배우라고 불릴만한 송강호, 김혜수를 필두로 영화인 1,123명이 여야가 합의한 세월호특별법 합의안을 비판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이 보장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한 것이다. 성명서에는 “지난 8월 9일부터 동조 단식에 들어간 영화인들로서는 유가족을 배제한 채 지난달 30일 발표한 여야의 세월호법 합의는 허탈함을 넘어 참담한 합의문”이라며 “백번 양보하더라도 수사기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위해서는 최소한 여야와 유가족이 참여하여 특검후보군을 형성하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했다. 백미는 “유가족을 배제하고 청와대와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가장 자유스러울 수 없는 여당이 주도하는 특별법을 우리는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유신정권, 5공화국 정권시기에도 없었던 강도 높은 정부 비판이다. 영화계 현안이 아닌 사회문제에 대한 선언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라고 한다.
사실 현재 한창 진행 중인 부산국제영화제에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영화 ‘다이빙 벨'을 부산시가 상영금지 압박을 가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영화인들이 엄청 화가 나 있었는데, 세월호특별법 합의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나라 영화인들의 정치수준이 정치인들의 정치수준보다는 훨씬 높은 것만큼은 증명이 됐다.
세월호특별법 합의 후 이틀 만에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사퇴했다. 3차례의 세월호특별법 협상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박영선 원내대표를 세차게 몰아붙였던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차지한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박영선 원내대표를 구명하고자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들에게 구명로비까지 했다. 그러나 박영선 원내대표는 자신이 9월 17일 당무에 복귀하면서 내걸었던 세월호특별법 협상을 마무리하고 물러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명예로운 퇴진의 길을 택했다.
이렇게 130석 제1야당의 여성 원내대표 실험은 끝이 났다. 148일만이다. 굳이 따지자면 실패다. 그러나 그 실패는 박영선 원내대표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아마도 박영선 원내대표와 같이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승부욕 강한 사람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실패가 이번과 같은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도 여성원내대표는 제1야당 뿐 아니라 집권여당에서도 지속적으로 나와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원내대표를 지냈던 박기춘 의원이 박영선 원내대표가 2차 협상 내용을 의원총회에서 추인 받지 못한 후에 고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영선 원내대표가 무엇에 쫓겼는지 알 수 없으나, 대표로 선임되자마자 너무 큰 현안이 놓여있었기 때문에 다소 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유가족 의견을 충분히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유가족 의견을 100% 반영하기는 어렵다. 박 위원장은 당 내에선 (협상에 대해)사과를 했다. 저쪽(새누리당)에도 미안함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 당에서 한 걸 왜 저쪽엔 못해. 새누리당은 적이 아니다. 국정의 한 축이자 동반자다. 박 위원장이 ‘내가 잘못했다. 이 부분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진정성을 보이면 여당에서도 결국 받는다. 그러나 지금은 감정싸움이 됐고, 새누리당은 (박 위원장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벼르고 있다” 박 원내대표가 이러한 고언을 새겨들었다면 새누리당에 의해 버르장머리가 고쳐지는 치욕을 맛보지는 않았을 텐데 두고두고 아쉬운 결과다.
그러고 보니 박영선 원내대표가 8월 4일 비대위원장이 되었을 때, 미리 오늘과 같은 일이 있을 것을 예견한 듯 한 사람이 있었다. 민주당의 18대 대선평가위원장을 지낸 한상진 교수다.
그는 8월 4일 MBC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제가 민주당 대선평가위원장직을 맡으면서 체험했던 경험으로 보면 박영선 원내대표와 같은 분이 비대위를 끌고 가선 전망이 없다.”고 했다. 그는 또 당시 박영선 의원과의 인터뷰를 회고하면서, “대선 패배와 관련해 박 의원이 ‘책임질 것이 없다, 최선을 다 했다' 그런 말씀과 함께 저에게 예컨대 ‘무슨 정복군 처럼 행동하느냐'고 하는 공격을 막 30분 동안 퍼댔다.”고도 했다. 한 교수는 “박 의원이 말씀하신 내용과 행동이 너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에 대화를 끝낸 다음에 너무 가슴이 아프고 힘들어 그 대화내용을 전부 다 기록을 해놓았다.”고 덧붙였다.
선견지명인지 경로의존인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한상진 교수의 8월 4일 인터뷰는 적중했다. ‘똥 싼 놈이 성낸다’는 옛말대로 박영선 의원의 남 탓하는 버릇은 원내대표를 사퇴하는 서한에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평형수 운운하면서 동료의원들을 탓하기만 했지, 자신이 지난 두 달간 얼마나 당에 큰 짐을 지워주었는지에 대한 미안함이나 반성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 두 달간의 당 지지도 추이만 봐도 자신의 무거운 책임을 자각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9월 30일의 3차 협상 결과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입장에서는 혹 떼려다 혹 붙인 ‘혹부리 영감’같은 처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부조직법에 유병언법 일괄처리, 세월호 유가족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130석의 국회의석이 무색하게 여당에 휘둘리는 상황이다.
그런데 새정치민주연합이 이 상황을 환골탈태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길은 보일 수도 있다. 자신들이 지난 4월 16일 이후 세월호 참사를 정치와 선거에 너무 이용만 한 것은 아닌지 하는 반성을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도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새누리당은 편가르기 정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는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길 바란다. 세월호 유가족을 대변할 수 있는 능력이 야당에 없다는 것이 증명된 이상 새누리당이 그들의 뜻을 보듬어 주어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이 책임여당이 나가야 할 길이다.

<김영필 정치개혁 시민의 힘 대표>
김영필 정치개혁 시민의 힘 대표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