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간(肝)이 부을 순 없다. 한 30대 과외교사가 투자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학부모에게 수십억원을 뜯어내는 ‘간 큰’ 행동을 하다가 결국 옥살이를 하게 됐다. 서울 강남 등지에서 과외교사를 하던 이모(30·여)씨가 문제의 주인공. 이씨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의 어머니인 김모씨에게 “선물옵션 투자로 돈을 불려주겠다”고 접근, 3개월여 만에 33억8000만원을 뜯어낸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로 지난 17일 법정 구속됐다. 특히 이씨는 가명을 써가며 범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불구속 기소된 상태에서도 같은 수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20억원을 뜯어낸 것으로 밝혀져, 그의 ‘거침없는’ 사기행각에 재판부는 입을 쉽사리 다물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대체 이씨는 왜 이 같은 사기행각을 벌였던 것일까. 또 수십억원의 돈을 건네받을 만큼 강남 사모님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 비결은 무엇일까. 이씨의 ‘억’ 소리 나는 사기행각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판사 민병훈)에 따르면 사건은 지난해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강남 지역에서 과외교사를 하며 돈벌이를 하던 이씨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과외교사를 모집한다’는 내용의 공고를 보게 됐다. 보통 과외는 입소문이나 누군가의 소개로 연결되기 마련. 하지만 이 공고는 그간의 고정관념을 깼다.
이씨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특이한’ 공고에 관심이 쏠려 지원을 했다. 공고를 낸 학부모 김씨는 지원자 면접을 거친 후 결국 이씨를 채용했다. 깔끔하고 똑 부러지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되고 말았다.
투자전문가 행세로 학부모 현혹
재판부 관계자 및 담당 변호사에 따르면 엄격한 절차하에 채용된 이씨는 과외수업 전후 김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씨가 가르치는 학생에 대한 진단부터 자기 인적사항 및 이력 등에 대한 세세한 정보까지.
갈수록 김씨와의 친분이 쌓이자, 이씨는 본격적으로 ‘마수’를 뻗기 시작했다. 투자전문가인 것처럼 속여 김씨의 주머니를 노렸던 것.
이씨는 “선물옵션을 하게 되면 투자금액의 수십~수백%까지 이익을 낼 수 있다”면서 “바로 내가 선물옵션 투자로 수익 700%를 올린 장본인”이라고 떠들어댔다.
또 “지금은 서울대학교 유명 교수에게 스카웃되어 투자전문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삼성증권으로부터 펀드매니저로 스카웃 제의도 들어왔다”는 등의 그럴듯한 거짓말로 김씨를 현혹시켰다.
금융 전문가에 따르면 선물옵션 시장은 한마디로 총칼 대신 돈으로 싸우는 전쟁터다. 단순 주식시장과는 달리, 누군가가 돈을 벌면 반드시 누군가는 돈을 잃는 ‘제로섬게임(zero-sum game)’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엄청난 대박을 안겨다 주기도 하지만 하루아침에 쪽박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전문가는 “선물옵션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고단위 위험성이 있는 시장”이라면서도 “하지만 주식은 가격이 올라야 돈을 벌지만, 선물옵션은 주식 값이 오르거나 떨어지거나 관계없이 돈을 벌수 있어 최근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3달 만에 33억여원 탕진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라는 유행가 가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요즘, 김씨가 이씨의 말에 귀가 솔깃하고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은 당연지사.
김씨는 ‘누구는 주식투자로 수십억원을 벌었다’, ‘누구는 옵션에서 단 하루만에 100배의 수익을 올렸다’는 이씨의 말에 갸우뚱하면서도 ‘나도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씨는 “나만 믿어라. 지금 좋은 자리가 있으니 함께 들어가자”면서 “3,4일이면 20% 상당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며 김씨를 꼬드겼다.
이씨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김씨는 2억5000만원을 시작으로 1~2주에 한번 꼴로 억대의 돈을 건넸다. 이렇게 해서 김씨가 이씨에게 투자 명목으로 건넨 돈은 3개월 동안 무려 33억 8000만원.
재판부에 따르면 이씨는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4억3000만원이 불었다. 이번에 큰 자리가 났으니 돈을 더 투자하면 대박이 날 것이다. 부모님, 이모 등의 돈 200억원도 들어간다”고 속여 김씨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주머니를 더 열게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두 달 만에 이 정도의 수익을 올렸으니 크게 한 턱 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9000만원 상당의 벤츠 스포츠카를 요구하기도 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실제 투자경험이 2개월에 불과했던 이씨는 33억원을 순식간에 날리고 말았다.
담당 변호사는 “이씨는 대학을 다니면서 선물옵션 투자를 잠깐 공부했던 것이 전부”라며 “김씨로부터 스포츠카를 받을 당시에도 그는 이미 20억원을 날린 상태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 변호사는 “이렇게 손실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데도 외제차를 받아내고 수십억원대의 돈을 더 뜯어낸 이씨의 ‘간 큰’ 행동이 놀라울 따름”이라며 “그는 자기 이름대신 ‘정OO’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의 계좌로 돈을 입금 받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불구속 기소상태서 추가 범행
이 같은 사실을 안 김씨는 노발대발하며 이씨를 검찰에 고소했다. 이씨는 올해 2월 불구속 기소됐다.
하지만 이씨의 일확천금의 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재판을 받는 와중에도 다른 사람에게 같은 방법으로 20억원을 뜯어냈던 것. 이씨는 이 돈을 명품 구입과 선물옵션 투자에 썼고, 결국 모두 날려 통장 잔고에는 ‘달랑’ 1000여만원만 남은 것으로 검찰조사 결과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자,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이씨는 ‘추가 범행 우려’ 사유로 인해 법정 구속됐다.
재판부는 “이씨가 인적사항을 속이고 범행을 한데다 계속되는 손실을 숨기는 등 죄질이 중해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최근 ‘된장녀(명품을 고집하는 사치스러운 젊은 여성을 비꼬는 말)’와 ‘학력 위조’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최대 이슈인 가운데, 이씨의 ‘종합세트적인’ 범행은 그래서 더욱더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정은혜 kkeunnae@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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