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20억 원 투자해 국제대회·전지훈련 지원
펜싱 강국으로 우뚝 선 한국, 아시아의 롤 모델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인천아시아경기대회를 맞아 기업 총수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그동안 국내 기업 총수들은 각 스포츠 협회 회장을 맡아 스포츠 부흥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총수들에게 협회장 타이틀은 명예이자 실력을 인정받는 자리였다. 그간 기업 총수들의 노력이 인천아시아경기대회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적극적인 현장경영, 과감한 투자 등은 강력한 스포츠리더십으로 해당 스포츠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놨다. 그중 펜싱협회장을 맡고 있는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의 활약이 눈에 띈다.
지난 20일 고양체육관에서는 펜싱 남자 에페 종목 경기가 열렸다. 이날 체육관을 찾은 관중은 5천 명이 넘었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할 정도였다. 마치 콘서트장을 찾는 관람객처럼 입장객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날 에페 종목에 출전한 정진선(30·화성시청) 선수는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관중석을 가득채운 시민들의 응원 덕이 컸다. 펜싱 관계자들은 이런 응원열기를 보고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고 소감을 말했다.
펜싱은 이제 더 이상 비인기종목이 아니다. 개인전이 끝난 22일까지 펜싱경기장에는 관중 1만 5천여 명이 다녀갔다. 한국 선수들은 압도적인 기량으로 메달 잔치를 벌여 성원에 답했다. 펜싱은 이번 대회에서 금 8, 은 6, 동 3개 등 총 18개의 메달을 따내는 아시안게임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4년 전 광저우 대회 때는 금 7개, 은 2개, 동 5개를 땄었다.
한국 펜싱의 구세주 손길승 협회장·SK텔레콤
한국은 펜싱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펜싱선수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운동을 해야 했다. 그랬던 펜싱이 국제무대에서 화려한 성적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펜싱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펜싱인들은 한국 펜싱의 성공원인을 손길승 대한펜싱협회장과 SK텔레콤에 돌린다. 손길승 협회장은 현재 SK텔레콤 명예회장이다.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는 그는 1965년 최초의 대졸 신입사원으로 SK그룹의 전신인 선경직물에 입사해 1998년 전문경영인으로 처음 5대 그룹 회장에 올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부친인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그의 평생동지로 불렸다. 그는 2009년 1월 협회장에 취임하면서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SK텔레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임 첫 해 12억 원을 지원한 뒤 매년 평균 20억 원을 투자해 왔다. 부임 전 연간 최대 5억 원 정도였던 투자금의 4배였다.
또 SK텔레콤은 한국 펜싱 저변 확대를 위해 2010년과 2011년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유치했다. 이번 아시안게임 준비과정에서도 농구장인 고양실내체육관을 아시안게임의 위상에 걸맞는 펜싱 경기장으로 개조하면서 2억여 원을 투자했다. 열혈응원단을 모집해 응원을 주도하며 분위기도 끌어올렸다. 또 펜싱 유망주들을 초청해 꿈을 품게 했다.
손길승 협회장은 인천아시안게임 대회 기간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이른 아침부터 경기장에 나와 모든 경기를 챙겨보고 선수단과 관계자들을 격려해 왔다. 기업인이지만 진정으로 펜싱을 사랑하는 스포츠인의 모습이었다.
국제대회 출전경험으로 선수들 성적 일취월장
손길승 협회장은 취임 이후 한국 펜싱 발전을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비전 2020’이다. 지난 2010년 열린 광저우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준비한 이 계획은 ‘2012 런던 올림픽 금메달 한 개, 2016 리우 올림픽 금메달 두 개, 2020 도쿄 올림픽 세계랭킹 1위’ 등을 목표로 삼았다.
이후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고 세계대회 출전 횟수를 늘려 펜싱 선진국의 기술과 경험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과거에는 예산을 이유로 일부선수들만 국제대회에 참가 했지만 지금은 모든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참가한다.
국제대회에 자주 참가하면 랭킹 상승과 함께 경험을 쌓을 수 있다. 펜싱은 랭킹에 따라 시드배정을 한다. 국제 대회 출전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포인트가 높아진다. 이는 곧 시드 획득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 예선을 거르면서 체력을 아끼고, 랭킹이 높은 선수를 피할 수 있어 호성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밖에 선수들은 루마니아, 헝가리 등에서 전지훈련을 했고, 유럽선수권대회에 각 종목 두 명씩 지도자를 보내 전력분석에도 공을 들였다.
그 결과 선수들의 기량과 성적이 눈에 띄게 향상하기 시작했다. 1년에 열두 차례씩 국제대회에 출전하면서 국가대표 선수들의 국제펜싱연맹(FIE) 랭킹이 급상승했다. 남자 사브르의 구본길(25)과 김정환(31·이상 국민체육진흥공단)은 각각 국제펜싱연맹 랭킹이 1, 2위에 올랐다.
현재 남자 플뢰레를 제외한 전 종목에서 세계 10위권 안에 한국 선수들이 포진했다. 그결과 런던올림픽에서는 금 2개, 은 1개, 동 3개를 따내는 등 목표를 뛰어 넘는 훌륭한 성적을 냈다. 자연스럽게 선수들의 자신감은 강해졌고 더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됐다.
펜싱 환경 좋아지자 실력도 상향평준화
펜싱환경이 좋아지자 펜싱 종목별·선수별 실력도 상향평준화 됐다. 그동안 한국이 가장 강세를 보였던 세부 종목은 남현희가 이끄는 여자 플뢰레와 정진선을 필두로 한 남자 에뻬였다.
그러나 남녀 사브르도 2012런던올림픽 여자 개인전(김지연)과 남자 단체전 금메달을 계기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네 종목 모두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했다. 펜싱 종목 전체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특히 여자 사브르의 약진은 눈부시다. 사브르는 아시안게임(2002년)과 올림픽(2004년)에 뒤늦게 도입돼 초창기 선수들이 꺼려했던 종목이다. 우리나라에선 1990년대 들어 처음으로 여자 중·고교 선수들이 나왔고, 플뢰레나 에뻬에서 빛을 보지 못한 선수들이 전향하는 종목으로 여겼을 정도다.
그러나 남들보다 두 발은 늦게 출발했던 한국 여자 사브르가 어느새 세계 정상권의 실력을 갖추고 아시아 정상이던 중국까지 꺾었다. 충분히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단체전에서의 성과가 눈에 띈다. 4년 전에는 단체전 금메달 6개 가운데 2개만 가져왔다. 이번에는 단체전에서도 개인전과 똑같은 수의 금메달을 쓸어 담았다. 에이스 이외의 다른 선수들까지 폭넓게 성장한 덕분이다. 그만큼 저변이 확대됐다. 손길승 협회장과 SK텔레콤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결과다.
성공한 펜싱 선수단 영화 ‘명량’ 단체 관람
손길승 협회장과 SK텔레콤의 든든한 지원 외에 선수들이 이번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던 데는 손 회장의 ‘이순신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수들에게 매번 강조하는 말이 있다. 바로 “내가 제일 유리한 위치에서, 싸울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만들어라. 피스트(펜싱 경기장)가 명량이나 바다라 생각하고 유리한 전법을 가져라”라는 말이다.
영화 ‘명량’이 인기를 끌기 전부터 선수들에게 했던 말이란다. 전선 열두 척으로 일본 함대 133척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전략에 대해 “상대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우리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적은 군사(선수)로도 힘을 낼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 결과”라고 강조하며. “이 전략을 한국 펜싱에도 접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사실 펜싱선수들은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명량’을 단체관람하며 전의를 다지기도 했다. 이제 한국 펜싱은 펜싱 강국으로 우뚝 섰다. 과거 프랑스나 러시아 같은 펜싱 강국과 연습경기를 치르기 위해 상대의 양해를 구하고 다녀야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펜싱협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브루나이 등의 고위 관계자들이 매일 경기장에 와서 한국 경기를 유심히 관찰하고, 경기 후에는 한국 펜싱과 지도자 교류가 가능하냐는 문의를 해 올 정도라고 한다. 한국펜싱이 아시아 펜싱의 롤모델로 성장한 것이다.
스포츠를 사랑하는 기업인들, 양궁·탁구·승마·사격·사이클 등 ‘메달로 결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부회장은 27~28일 인천 계양아시아드 양궁장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 양궁 리커브와 컴파운드 종목의 결선 게임을 참관했다. 정의선 부회장은 부친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대를 이어 2005년부터 10년째 대한양궁협회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평소에도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책이나 스피커 등을 개인적으로 선물할 만큼 양궁에 대한 관심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자동차그룹은 그룹과 계열사가 함께 다각적으로 양궁을 지원한다. 장비 개발 등 양궁 경쟁력 강화를 위해 1985년부터 투자해온 규모만도 300억 원이 넘는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도 본업보다 스포츠 관련 업무에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7월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은 뒤로 줄곧 그래왔다. 더욱이 조양호 회장의 스포츠 사랑은 예전부터 유명하다.
조양호 회장은 대한탁구협회 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한진그룹 역시 40년 넘게 한국 탁구 발전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1973년 창단한 대한항공 여자실업팀은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탁구 실업팀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행보 역시 화제다. 인천 아시안게임 승마 마장마술 단체전이 열린 드림파크 승마장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김승연 회장이 공개석상에 등장한 건 지난 2월 집행유예를 받아 석방된 지 7개월 여 만에 처음이라 더욱 시선이 몰렸다.
사실 김승연 회장이 경기장을 찾은 건 한화그룹 소속 승마단(갤러리아승마단)에서 국가대표로 뛰고 있는 막내아들 김동선씨를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김승연 회장은 아들이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또 한 가지 한화는 화약기업답게 사격을 후원한다. 대한사격연맹 회장사로서 사격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2009년에는 전자표적지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등 투자를 지속 중이다. 물론 아들과도 인연이 깊은 승마협회 회장사로서 전국승마대회 개최, 승마단 운영 등을 통해 승마 발전을 지원 중이기도 하다.
그 외 삼성그룹은 대표적인 비인기종목 육상에 투자하고 있다. 2000년 삼성전자 육상단을 창단하고 남녀 장거리팀과 경보팀을 운영 중이다. 이번 아시아경기대회 육상 기대 종목 경보의 국가대표 박칠성 선수 등 7명의 선수를 배출했다.
또 이건희 회장은 대한레슬링협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되면서 대규모 투자를 통해 발전을 지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83년에 창단해 올해로 31년 역사의 삼성생명 레슬링팀은 국가대표 사관학교다. 이번 아시아경기에서도 김현우, 류한수, 윤준식 선수가 출전했다.
자전거매니아로 유명한 구자열 LS그룹 회장은 2009년부터 대한사이클연맹 회장직을 맡으면서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 지원하고 있다. 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 메달 획득을 위한 ‘중장기 사이클 발전 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 매년 대규모 예산을 투자하고 있다.
포스코는 故 박태준 명예회장 시절부터 대한체조협회와 인연을 맺고 있는 체조계의 든든한 30년지기 동반자다. 포스코교육재단을 통해 전국 초·중 체조대회를 개최해 유망주 발굴에 앞장서는 한편 협회 회장사인 포스코건설에서는 자체 실업팀을 운영하고 있다. 체조협회에 지원하는 금액만 매년 7억 원에 달한다.
이와 관련해 이용우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는 “우리 기업들은 인기 여부와 상관없이 스포츠를 통한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 차원에서 다양한 종목을 꾸준하게 지원해오고 있다”며 “기업들의 지원이 그간 땀 흘린 선수들의 노력에 보탬이 되어 이번 인천아시아경기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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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