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와 기업가정신 37] 자본주의를 위한 ‘담대한 회의’
[창조경제와 기업가정신 37] 자본주의를 위한 ‘담대한 회의’
  • 김의식 교수
  • 입력 2014-09-29 11:32
  • 승인 2014.09.29 11:32
  • 호수 1065
  • 4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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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각 단계는 구조적 위기가 발생하면 환경에 더 적합한 버전으로 진화해왔다. 2008년 금융위기로 마침내 자본주의의 네 번째 시스템 전환이 시작됐는데 바로 자본주의 4.0이라는 인식에 기초한다. 자본주의 4.0은 정부와 시장이 모두 불완전하며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는 인식에 기인한다. 자본주의 4.0은 세계가 예측하기 어려운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는 인식을 배경에 두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4.0으로의 구조적 전환은 정치와 경제, 정부와 시장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한다.

자본주의 4.0은 적응성 혼합경제를 특징으로 하는데 자본주의 4.0에서는 정부와 시장의 상호의존적 관계가 의식적으로 인식된다. 자본주의 4.0에서는 회의주의, 실험정신, 유연성이 강조되며, 제도적 적응력과 이데올로기적 유연성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통념에 따르면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의 경제불황은 불가피한 재앙이다. 만약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건에 의해 어떻게든 경제불황이 시작됐을 거라고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분석가들은 리먼브라더스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건에 의해 세계 경제재앙이 촉매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10년 동안의 방종과 탐욕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성의 기간이 불가피한 도덕적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가 저술한 <자본주의 4.0 :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Capitalism : The Birth of a New Economy)>은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번 금융위기는 불가피한 것도 아니었고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도 아니란 것이다.

사실 경제에서 불가피성과 도덕적 정당성은 그다지 유용한 개념이 아니다. 리먼브라더스 위기와 그 이후의 사태는 신의 섭리가 아닌 유감스러운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일련의 실책들의 논리적 결과였다. 이 유감스러운 사건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미국 재무장관이 자본주의 시스템, 특히 금융시장에서 정부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칼레츠키 교수는 밀턴 프리드먼이 역사상 최악의 미국 재무장관으로 꼽히는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을 대공황의 주범으로 평가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헨리 폴슨(Henry Merrit Paulson Jr.) 전 재무장관을 2008년 금융위기의 주역으로 평가하고 있다.

앤드루 멜런은 1929년 월스트리트가 폭락한 후 미국 은행의 약 3분의 1이 파산하도록 결정했다. 그 뒤 밀턴 프리드먼은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를 겪고 있는 은행들을 구제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는 대신 미국 금융시스템이 파산하도록 만든 의사결정 때문에 대공황이 초래됐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칼레츠키 교수가 미국 정부 전체의 경제철학을 좌우하는 사람으로 지목했었던 골드만 삭스의 전 회장 헨리 폴슨 재무장관이 저지른 정책 오류는 무엇일까?

첫 번째 실수는 리먼브라더스 사태 몇 년 전에 도입된 시가평가(mark-to-market) 회계기준과 리스크 가중 자본요건(risk-weighted capital requirements)으로 인한 일련의 규제 실책이었다.

두 번째 실책은 2008년 봄과 초여름에 석유와 식량 가격과 관련해 발생한 투기를 규제하지 않은 것이다.

세 번째로 가장 큰 실책은 신용경색이 시작됐을 때 미국 정부가 금융 시스템에 직접 개입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즉 영국 정부가 대공황 이후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주요 은행에 발생한 가장 심각한 예금인출사태였던 노던록3의 파산 당시 직접 개입해 영국을 구했던 것처럼 미국 정부도 모든 미국 금융기관들에게 일시적으로 무제한 지급보증을 제공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칼레츠키 교수는 은행의 탐욕과 무책임한 대출자들의 무지함 그리고 금융학자들의 어리석음도 금융위기의 원인이지만, 2007~2009년 경기순환주기가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존립 위기로 확대된 것은 정부와 시장이 상호의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시장근본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저명한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는 <메가트렌드 차이나>에서 중국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칼레츠키는 중국이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 국가로서 놀라운 발전을 이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핵심인 혁신과 경쟁의 자유와 권위주의적인 정치 시스템에서 요구하는 복종 사이에는 본질적인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에 ‘베이징 컨센서스(Beijing Consensus)4'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또 지난 20년 동안 세계경제에 발생한 근본적인 장기적 변화는 경제 호황을 초래하는 메가트렌드였고, 2007~2009년의 붕괴는 경기순환성 과잉 금융활동 때문에 빚어진 일시적 현상일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즉 호황과 불황은 영원히 되풀이되는데 서브프라임 사태는 구조적 요인이 아니라 경기순환성 요인이 담보대출 금융 부문 폭락의 원인이었으며, 당시 정치권이 무능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큰 금융위기로 확대시켰다는 논지다.

필자는 아나톨 칼레츠키 교수가 지향하는 칼 포퍼(Karl Popper)의 점진적인 사회진보, 그리고 생물철학의 거장 대니얼 데닛(Daniel C. Dennett) 교수가 주장하는 진화와 진보의 양립가능성을 긍정하는 발전적 진화주의 철학에 대해 깊이 공감한다.

다만, 미국 금융위기의 주범으로서 헨리 폴슨을 속죄양으로 평가하는 부분과 미국의 근본적인 경제시스템과 미국의 역할에 대한 장밋빛 낙관론에 대해서는 자기성찰이 좀 더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새 자본주의 모델에서는 시장의 힘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뉴딜의 시대처럼 지나치게 시장에 간섭하지는 않겠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계속 정치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앞으로 정치를 하려면 자본주의는 위기가 발생하기 쉽고 불확실성에 둘러싸여 있으며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민주적 자본주의를 믿으면서 동시에 민주적 자본주의의 많은 결함과 모순을 인정하려면 회의주의와 논리를 거스를 수 있는 지적인 용기가 모두 필요하다. 이러한 용기를 ‘담대한 회의(Audacity of Doubt)'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김의식 교수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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