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계 ‘야사’ 이곳서 이뤄졌다
정·재계 ‘야사’ 이곳서 이뤄졌다
  • 정은혜 
  • 입력 2007-05-23 13:17
  • 승인 2007.05.23 13: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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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입맛 사로잡은 한정식집 ‘장원’

한국 정치사에 ‘밀실정치’라는 말을 탄생시켰던 고급 한정식집 ‘장원’의 창업주인 주정순 여사가 지난 1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1958년 고인이 개업한 이후 자유당 시절부터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한국 막후 정치’와 ‘비밀 회담’의 본산으로 통한 이곳은 현재 큰딸 문수정(54)씨가 바통을 이어받은 상태. 특유의 손맛과 친절함으로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전대통령을 포함한 정계 인사와 재벌 총수 등을 단골손님으로 유치, 장원은 일약 장안 최고의 한정식 집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거물급 인사들의 입맛을 ‘확’ 사로잡은 이곳엔 과연 어떤 특별함이 숨어 있는 것일까.
본지는 주여사의 별세로 새삼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는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위치한 ‘장원’을 찾았다.



지난 16일 오후 7시. 정문에 들어서자 한눈에 ‘장원(莊園)’이라고 씌어진 낙인 형태의 옥호가 눈에 들어온다. 대문에 하나, 입구 손잡이에 하나, 마지막은 출입문 위에 찍혀 있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낙인의 엄중한 휘호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정갈한 차림의 여종업원 5~6명이 양쪽으로 나뉘어 기자를 맞이했다. 예약을 확인한 후 여종업원은 입구 쪽에 위치한 방으로 안내했다. 두 평 남짓한 방에 놓인 병풍과 자개장롱 등이 장원의 세월을 짐작케 했다.


‘비밀 모임’에 적합한 구조

장원은 ‘홀’ 개념의 공간이 없다. 최소 2인~최고 50인까지 들어갈 수 있는, 총 10여개의 ‘방’만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방안에서 식사가 이루어지고 손님을 마주칠 일이 적기 때문에 ‘보안’을 유지하기에 ‘안성맞춤’인 셈이다.

저녁식사는 1인분에 7만원. 정해진 정식코스이기 때문에 별도의 메뉴판은 없다. 술자리를 겸한다 하더라도 주문을 따로 받지 않는다. ‘알 만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에 ‘알아서’ 별도의 안주를 갖다 준다는 게 이곳 지배인의 설명.

XO급을 비롯해 고급양주는 20~30만원 대, 소주는 1만원이다. 한정식 집을 두고 ‘일반서민들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게 한다.
방에 들어온 지 10여 분이 지나자 상이 차려진다. 20여 가지가 넘는 찬그릇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다.

음식 맛은 과연 소문대로였다. 짭조름한 젓갈과 달착지근한 조림, 담백한 생선구이까지. 음식 하나 하나가 기대만큼의 맛을 냈다.

식사를 마친 후, 기자와 대면한 장원 문수정 사장은 “음식 맛 비결은 화학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엊그제 어머니의 별세로 인해 문 사장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심신이 아무리 피곤해도 가게에는 꼭 들른다는 그녀에게서 장원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곳곳에 찍힌 낙인 형태의 옥호 의미도 문 사장에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다시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는 의미로 낙인 형태로 만들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이곳 저곳에 찍어둔 것이라고. 일종의 ‘찜’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토록 애지중지하는 ‘장원에 얽힌 추억’에 대해 그녀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정·재계 ‘야사의 본산’

이에 대해 문 사장은 “그 부분은 나도 잘 모른다”며 ‘노코멘트’ 입장을 보였다. 어머니께 옛날 거물들의 뒷얘기를 해달라고 하면 조용히 가슴에 묻고 가겠다는 말씀만 하셨을 뿐 구구절절이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장원 곳곳에 얽힌 일화는 과거 장원을 찾았던 손님 및 당시 고위층과 자리를 함께했던 인사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박정희 전대통령은 주로 청와대 경호실이 관리하는 ‘안전가옥(안가)’을 이용했지만, 여야 의원들과 고위 관료들은 요정을 찾았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숱한 정치협상이 이뤄졌고, 계보모임이 열렸다고.

70년대 중반 국무총리 공보수석비서관을 지낸 A씨에 따르면, 종합청사의 장관들이 거의 매일 장원에 가서 밥을 먹는 것을 안 박정희 대통령은 ‘공무원들은 점심 때 요정 가서 밥 먹지 말라’고 구두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60년대 중후반 민중당·신민당 원내 총무를 지낸 YS등 야당 정치인들은 외상으로 밥을 먹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설날이나 추석 등 자금사정이 풀리는 명절 무렵, 한꺼번에 ‘목돈’을 주는 방법으로 계산을 했다고. 뿐만 아니라 10~13대 의원을 지낸 B씨의 회고록 ‘문주 40년’에는 노태우
전대통령과 관련된 일화도 적혀 있어 흥미를 끈다.

이 회고록 내용에 따르면, 87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된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장원에서 각 시도 지부장 회식을 열었다. 노 대표는 지부장들에게 술잔을 돌리며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 때 부산지부장이었던 곽정출 의원이 “왜 군인끼리 다 해먹느냐”고 하자 이에 격분한 노 대표가 돌리던 작은 잔을 곽 의원에게 집어던졌다고 한다.

JP 역시 토속적인 장원의 음식 맛이 좋아 자주 찾은 거물급 인사 중 하나다. 장원의 음식 맛을 직접 관리했던 고 주정순 여사는 가장 오래된 단골손님인 JP가 찾아오면 마치 식구가 온 것처럼 반겼다고 한다.

한편 장원이 청진동에 있을 당시, 골프경기에 참가했던 30~40명의 인원은 골프장 식당을 이용하지 않고 곧장 장원에 모여 식음을 즐기곤 했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 거물급 인사 좋아하는 음식은?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장원의 단골손님이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쑥 넣은 된장찌개를 좋아했고, 반찬은 서너 가지만 시켰다고 한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과일을 무척 좋아해, 밥 대신 과일만 먹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삭힌 홍어에 묵은 김치와 삼겹살을 곁들여 먹는 삼합을 즐겼는데, 이 음식은 지금까지도 장원의 ‘최고 인기메
뉴’로 손꼽힌다고.

이병철 전삼성회장은 과식하지 않았으나 팁은 후했으며, 정주영 전현대회장은 특별히 가리는 것 없이 푸짐하게 고루 먹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단한 미식가로 알려져 있는 JP는 이곳의 호남식 장아찌나 나물 같은 토속음식을 좋아해 현재까지도 장원을 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 이병철 전삼성회장,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 정몽준 의원, 정일권 전총리 등도 장원의 남도음식 고유한 맛에 반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엄격한 종업원 ‘입’ 관리

주여사의 별명은 ‘엠피(헌병)’다. 음식 맛과 고객 관리, 그리고 종업원 관리에 엄격했기 때문이다.

주여사는 최고의 재료를 써야 한다는 것과 이익이 남는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또 ‘남도음식 고유의 맛’을 내도록 주방장들을 직접 교육시켰으며, 손님 술버릇이나 뒷얘기 등을 일절 입밖에 내지 못하도록 종업원들을 철저히 감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번은 주여사가 종업원들에게 “단정하게 열심히 일하면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후 새로 살림을 차려 나간 한정식 집이 ‘미당’, ‘늘만나’, ‘수정’, ‘두마’ 등 20여 곳. ‘장원’을 ‘한정식집 사관학교’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한편, 16일 오후 8시 30분께 기자가 박진 한나라당 의원이 들어오는 것을 목격, 이후 장원 지배인 및 전무 등에게 물어본 결과 이들은 ‘무슨 소리냐’는 반응을 보였다.

정재계 인사들을 비롯한 거물급 인사들이 자주 찾는 것은 맞지만, 누가 오고갔는지 등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정은혜  kkeunna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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