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리 이른 추석이라 하더라도 가을은 가을이다. 추석이 지나니 제법 서늘하다. 그야말로 가을이 익어간다는 표현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7-8월 하얗게 만개했던 박꽃이 어느새 열매를 맺고 가을 하늘 아래 잘도 익어간다. 유용하게 사용될 바가지가 되기 위해 내공을 키워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하찮은 바가지더라도 여러 공정을 거쳐 쓸모 있는 물건이 돼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섭리란 게 참 존경스럽다.
이번 주는 정치권에서 거세게 박의 바람이 휘몰아친 한주였다. 정부여당에서 가장 힘센 사람과 새천년에 들어와서는 제1야당에서 누구도 갖지 못했던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바로 그 당사자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대통령이다. 지난 대선 여성의 섬세함과 자애로움을 기대하면서 한 표를 던진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지난 5월 19일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국민사과담화를 발표하며 울먹이던 그녀를 보면서 자신의 손목을 부끄럽지는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것이 악어의 눈물임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난 화요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거침없이 야당과 세월호 유가족을 비판하는 모습을 봤을 때 그녀에게 섬세함과 자애로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커다란 착각이었음을 많은 이가 자각했을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박영선. 박영선 원내대표는 우리나라 제1야당 최초의 여성원내대표다. 그녀는 여성대통령 시대를 맞이해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의 리더십에 맞서 진정으로 섬세함과 자애로움의 리더십을 보여주겠다며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박영선 원내대표를 위해 청와대의 카운터 파트너인 정무수석을 조윤선 전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교체까지 해줬다.
물론 조윤선 정무수석은 정무수석 역할보다 퍼스트레이디 역할에 더 열중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받게 하기도 했다. 어쨌든 박영선 원내대표는 7.30 재보선 참패로 말미암아 당대표를 사퇴한 김한길, 안철수의 바통까지 이어받아 새정치민주연합의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쥐게 됐다. 그런 그녀가 지난 한 주 동안 탈당소동을 벌인 당사자가 됐다. 당원들과 소속 국회의원들을 향해 공갈, 협박처럼 비춰질 만한 행동을 당대표가 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대한민국 정치를 이끌어가는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사람이다. 각각의 정치세력을 대표하고 있는 적대자이기도 하지만, 각자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상대를 이용하기도 하는 정치적 동반자기도 하다.
포문은 박근혜 대통령이 먼저 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화요일 국무회의의 모두 발언에서 ‘최근 경제 활성화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는데 국회에 계류돼 있는 경제 활성화 법안 때문에 경제회복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국회와 정치권에서 제 기능을 찾고 국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며 올바른 정치가 이뤄져야 함’을 강조했다.
“세월호특별법도 순수한 유가족들의 마음을 담아야 하고 희생자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외부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며 유신시대를 방불케 하는 교시를 내렸다.
또한 장황하게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을 곁들이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삼권분립의 원칙을 스스로 파괴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즉 ‘세월호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에 대해 일부에서 대통령이 결단하라고 하고 있지만, 이는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없고 결단을 내릴 사안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도 국회에 대해서는 “국회의원 세비는 국민들의 세금으로 나가는 것이므로 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다. 국민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때는 국민에게 의무를 반납하고 세비도 돌려줘야 한다”며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 위에 군림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대한민국 헌법체계상 국권의 최고기관은 국민이다. 그 국민에 의해 대통령도 선출되고 국회도 구성된다. 대통령은 국회위에 군림할 수 없다. 오로지 대통령과 국회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은 국민이다. 국민의 역할마저도 대통령이 빼앗으려 하면 되겠는가? 아무런 감동도 없이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대통령의 정치권을 압박하는 발언이 제1야당의 최고책임자가 유고 중에 있었다는 점은 유감이다. 자신의 발언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나 전략은 실패한 것 같다. 새누리당 내 반발하는 목소리가 훨씬 크게 들렸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대통령 발언은 탈당운운하며 자충수에 걸려 3일간 칩거하던 박영선 새정연 원내대표에게는 당무복귀의 명분이 됐다. 다음날 오후 초췌한 모습으로 국회에 나타난 박영선 원내대표는 “어제 대통령은 삼권분립 운운하며 세월호특별법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모순적 통치행위를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 최후통첩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결국 그동안 세월호 협상을 청와대가 뒤에서 주도했음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쩌면 머쓱해야했던 당무복귀 기자회견이 박근혜 대통령이 전날 제공한 일용할 양식덕분에 약간은 폼 나게 진행됐다.
박 원내대표는 비대위원장으로서 자신의 한계 때문에 이상돈 영입을 시도했음에도 불구 그에 대한 사과도 없었고, 당 지도부가 만든 시나리오에 따른 소속 의원들의 전수조사 결과 당무에 복귀하게 됐음에도 원로 고문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이 자리에 섰다는 뻔뻔함도 보여줬다.
자신을 물러나라고 했던 의원들을 향해서는 “그동안 저의 잘못에 분노한 분들은 저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그 돌을 제가 맞겠습니다”라며 강한 적개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박영선 원내대표가 그 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당에 아직도 전형적인 계파논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애처롭기까지 하다.
정부가 담배 값을 올리겠다고 한다. 담배가 건강의 주된 위험요인이기 때문이란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스트레스 때문에 담배를 피는 사람이 느는 것이다. 정치권은 담배 값을 올리기 전에 서민들 스트레스 받지 않게 좋은 정치부터 올인하고 볼 일이다.
<김영필 정치개혁시민의힘 대표>

김영필 정치개혁 시민의 힘 대표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