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됐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됐다’
  • 정은혜 
  • 입력 2007-02-15 13:21
  • 승인 2007.02.15 1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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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사칭 30대 주부 이중생활 풀스토리

지난 6일 한 30대 주부가 국정원 비밀요원을 사칭, 9년 동안 남편은 물론 친인척, 친구까지 속이고 7억여 원을 뜯어낸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기도 부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모(31)씨가 그 장본인.
경찰에 따르면 이씨의 범행 동기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고, 사기수법은 대담하다 못해 기상천외하기까지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수십 명에 이르는 피해자들이 이씨에게 거액의 사기를 당하고도 피해사실을 숨기려 드는가 하면, 심지어 사실여부를 다시 확인해보라며 여전히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 도대체 이씨는 어떤 식으로 사기 행각을 벌였던 것일까.



“그녀의 정체는 특급 비밀요원이 아니라 특급 사기꾼이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계자의 말이다.

이 관계자는 이어 “가족과 남편까지 이렇게 완벽하게 속인 황당한 사건은 경찰생활 30년 만에 처음”이라며 이씨의 치밀한 사기행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과시용으로 사칭한 게 발단
이씨가 ‘잘못된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인 20세 초반부터. 그는 작은 회사에서 2년여 간 경리로 일하다 ‘속기사’로 취업하기 위해 각종 채용공고를 보던 중 ‘국가안전기획부’의 존재를 알게 됐다.

친구들에게 농담 삼아 “안기부에 속기사로 취직했다”고 거짓으로 과시한 이씨는 친구들이 부러워하자 우쭐했다. 이어 이씨는 부모와 일가친척 등에게도 ‘안기부 속기사’라고 속였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꿀리지 않기 위해’ 했던 이씨의 거짓말에 모두가 속아 넘어가자, 이씨는 점점 더 대담한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명칭을 변경한 후에는 국정원 직원으로 행세했고, 직함은 ‘국정원 속기사’에서 ‘국정원 자금담당 요원’으로, 다시 ‘청와대 파견 비자금 담당 국정원 비밀요원’으로 바뀌었다.

상고 출신인 이씨는 출신 학교와 정치적 배경 등 주변신상에 관한 것부터 철저하게 학습했다.

뿐만 아니라 이씨는 재력가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명품 옷으로 온몸을 휘감고 다니는가 하면, 고급차를 몰고 다니며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고 다니기도 했다.

과시욕에 취하다보니 이씨는 사칭 직함에 걸맞는 씀씀이를 갖게 됐고, 결국 카드빚 5,000만원을 떠안았다.

하지만 이씨는 지출만 있고 수입은 한 푼도 없던 터. 그는 결국 사기행각을 벌이기에 이른다.

그는 먼저 자신을 가장 잘 믿어주는 가족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 아버지와 외삼촌에게 각각 1억 원, 3억 원을 빌려 ‘물 쓰듯’ 펑펑 쓰고 다녔던 것이다.

돈이 바닥난 이후에는 일가친척과 고등학교 동창생들에게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이씨는 “국정원이 기업으로부터 받은 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받아 현금화해서 정치 비자금을 마련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하면 연 25% 이자를 챙길 수 있다”며 동창생들을 속였다.

이런 식으로 이씨가 뜯어낸 돈은 26회에 걸쳐 3억 380만원.

이 과정에서 이씨는 주변 사람들이 의심할 경우, 인터넷에서 내려 받은 국가정보원법과 보안규정을 보여주며 “비밀사항에 대해 발설하면 국정원법에 의해 처벌된다”는 식으로 겁을 줘 위기를 피해갔다. 또 연 25%의 고리이자를 주는 수법으로 피해자들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거짓말

처녀시절의 이런 ‘위험한’ 거짓행동은 결혼 후에도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씨는 지난 2001년 중학교 동창과 결혼했다. 남편은 카센터 운영자였다.

결혼식 당시 주례는 “신부 이양은 정부기관 공무원으로 근무한다”고 하객들에게 소개했다. 이에 양가 부모 및 친척, 친구들은 이씨가 국정원 요원임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

아이 둘을 낳은 후에도 이씨는 자신의 가짜 신분을 과시했다.

먼저 아이 백일잔치에는 이씨가 직접 ‘국정원 직원 일동’이라고 적힌 화환을 보냈다. 자신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국정원 명의의 꽃다발을 보내는 등의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또 남편과 몇몇 친구들에게 ‘국정원 자금담당’이라는 가짜 동료를 소개하기도 했다.

아내가 지각할까봐 깨우는 남편에게 그는 “특수 업무를 하는 비밀요원이어서 늦게 출근해도 되고 일이 있으면 호출한다”고 변명했다.

또 남편이 월급액수를 물을 때면 “보안사항이니까 묻지 말라”며 화를 냈고, “명함이나 신분증도 만들 수 없다”고 둘러댔다.


피해자들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이 같은 이씨의 ‘이중생활’은 소문을 타고 돌아 최근 사정당국의 첩보망에 포착, 결국 9년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청 특수수사과 관계자는 “이씨는 체포 당시에도 계속 국정원 비밀요원이라고 주장했다”면서 “두 차례 경찰조사에서 ‘비밀요원이라 이름이 서류상에 올라 있지 않다’고 부인하다가 세 번째 조사에서 모든 것을 자백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 관계자는 “이씨는 세 번째 조사를 받는 중에도 ‘국정원 직원한테 함부로 해도 되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귀띔했다.

한편 경찰청 특수수사과 관계자에 따르면 이씨의 거래내역을 조회한 결과, 10여 명의 피해자가 더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도 이씨를 ‘국정원 비밀요원’으로 믿고 고소를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경찰은 “심지어 이들은 경찰에게 이씨의 신원에 대해 재확인을 수차례 요구하기도 했다”며 “이렇게 황당한 사건에 대해 피해자들이 이처럼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
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허약점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으로도 보인다”며 씁쓸해 했다.


#“ ‘사기의 기술’ 속지 마세요”

최근 ‘사칭사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국세청이나 금융기관을 사칭한 ‘환급 미끼’ 사기는 이제 고전이 된지 오래다. 직원 사칭이 우체국이나 경찰, 검찰, 관세청, 소방관, 환경미화원, 복지단체 등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되고 있는 게 요즘 추세다.

사칭사기 가운데 가장 흔한 유형은 주로 ARS 전화를 이용, 금융감독원이나 검찰청 등 공공기관을 사칭하는 것. 주민등록번호나 휴대전화번호, 계좌번호, 비밀번호 등 개인정보를 알아내거나, 은행 CD기를 통해 계좌이체를 유도해 돈을 챙기는 수법이다.

구청 직원과 사회복지사, 수도·전기 검침원, 가전회사 직원 등을 사칭, 소액을 뜯어가는 사기꾼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경기도에서는 시청 공무원을 사칭해 영구임대주택 당첨을 미끼로 보증금 60만원을 챙겨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으며, 구청 공무원을 사칭,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받아간 사례도 있다.

또 수도나 전기 검침원을 가장해 수도요금을 현금으로 받아 챙기거나 전기설비 교체 수리비를 받아가기도 했으며, 가전회사 직원이라고 속여 경품 제공을 빌미로 은행 계좌번호를 알아내 돈을 인출해 달아나는 사건도 잇따랐다.

정은혜  kkeunnae@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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