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원장 침묵 속 국정원 대개혁 칼 빼들었다
이병기 원장 침묵 속 국정원 대개혁 칼 빼들었다
  • 류제성 언론인
  • 입력 2014-09-15 09:52
  • 승인 2014.09.15 09:52
  • 호수 1063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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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ilyoseoul.co.kr

통일정책 역량 강화에 초점…대북정보 인원 보강
이례적으로 야당 정보위원으로 부터 호평도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이명박 대통령 시절 4년 동안 국가최고정보기관을 이끌었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최근 굴욕을 맛봤다. 재임 당시 개인비리(억대의 금품수수) 혐의로 기소돼 1년 2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지난 9일 출소한 그는 불과 이틀 만에 다시 법정에 섰다. 구속은 되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는 이날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 전 원장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직원들에게 선거 개입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원 전 원장은 국정원법위반 혐의는 유죄, 공직선거법위반 혐의는 무죄를 받았다. 다행히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바람에 햇볕을 본지 이틀 만에 다시 수감되는 신세는 면했지만 국정원의 정치개입 논란을 확산시켰다.

정보기관의 정치개입, 선거개입 문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이래 우리정치의 고질병이었다. 1996년의 이른바 ‘안풍’(安風)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15대 총선을 앞두고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 예산을 집권당이었던 한나라당 강삼재 사무총장과 김기섭 안기부 운영차장이 공모해 여당의 선거자금으로 유용한 사건이다.

정치불개입 공개적 선언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현 정부에서도 시빗거리였다. 박근혜 정부 초대 국정원장이던 남재준 전 원장이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촉발된 국정원 개혁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같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엔 적극성을 띠었다는 비판이 일었다. 심지어 유우성씨 간첩 사건이 정국전환을 위한 국정원의 ‘조작’이란 의혹까지 제기됐다.

남 전 원장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이병기 현 국정원장은 어떨까. 이 원장도 정보기관의 정치개입 시비에선 일단 자유롭지 않다. 그가 안기부(현 국정원) 2차장으로 있던 1997년 대선 때 ‘북풍’(北風)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북풍 사건은 당시 김대중 후보가 북한과 접촉해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내용의 재미동포 윤홍준씨 기자회견을 안기부가 도왔다는 의혹이다.

이 원장은 지난 7월 인사청문회에서 “북풍과 관련해 1년간 출국금지를 당해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를 당하지도 않았고 재판을 받지도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의혹을 말끔히 씻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국정원의 정치불개입’을 공개적으로 천명해 실천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 원장은 인사청문회에서 “국정원이 정치개입 논란에 휩싸이지 않고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만 일하는 조직이 되도록 만들 것임을 약속 드린다”고 선언했다. 또 “저는 지난날의 허물을 반면교사로 삼아 제 머릿속에 ‘정치관여’라는 말은 온전히 지워버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원장의 이 같은 ‘정치 불개입 선언’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일단은 “우리 정치구조상 정보기관이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는 어려울 것”이란 현실론이 많다. 하지만 이 원장의 의지가 대단한 만큼 기대해 볼만한 하다는 낙관론도 있다.

대북전략국 부활 눈길

국회 정보위 소속의 새누리당 A 의원은 “안기부 근무 경험이 있는 이 원장이 국정원 스스로 변신하는 ‘셀프 개혁’을 위해 팔을 걷어 부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귀띔했다. A 의원에 따르면 현재 국정원 셀프 개혁은 두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정치 불개입과 국정원 인사(人事)의 정상화다.

실제로 이병기 호(號) 국정원은 통일정책 역량을 강화하는 데 운영의 초점을 맞춘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정보 파트 인원을 보강해 대북업무에 적극 나서는 쪽으로 방향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휴민트’(HUMINT·인적 정보 수집)의 능력 향상을 위해 대북정보 파트 인원을 늘렸고, 3차장 산하의 대북전략국도 부활시켜 대북 전문 인력을 집중배치했다고 한다.

이 원장은 또 지난해 연말 남재준 당시 원장이 국회에 보고한 자체 개혁안의 준수도 직원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여기엔 정치개입금지 서약 의무화, 정치성 지시 이의 신청제도 도입, 국회·정당·언론사 배치한 파견관 철수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원장은 취임 직후 대대적으로 국정원 인사를 단행하기도 했다.

특히 1급 상당 고위직을 대거 물갈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본부와 지방지부 1급 간부 절반 이상이 교체된 것으로 전해졌다. 지금은 2~3급 후속인사가 진행 중이다. 이는 인사 적체를 해소하는 동시에 전임 남재준 원장 색체 지우기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와의 마찰도 있었다고 한다. 이 원장이 단행한 1급 간부 한 명의 인사가 청와대의 개입으로 뒤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원장이 바뀔 때마다 대폭적인 인사가 이뤄진다. 주로 자기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바람에 잡음이 일어나곤 했다. 남 전 원장도 취임 당시 군(軍) 시절 인연을 맺었던 부하들을 국정원으로 대거 끌어들이는 바람에 직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었다.

남 전 원장은 전임인 원세훈 전 원장 시절 1급 보직의 90%를 교체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들을 전진 배치했다. 이번에 이 원장이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조치한 간부들은 남 전 원장이 발탁한 인물들이다.

1급 인사 비교적 공평

특히 남 전 원장은 이 원장에게 자리를 넘겨주면서도 자기 사람을 챙겼다는 주장이 국회에서 나오기도 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은 이병기 원장 인사청문회 때 “남 전 원장이 퇴직 후에도 국정원 인사에 관여하는 등 국정원을 사병화(私兵化)시켰다”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남 전 원장이 14명의 신규직원을 5급 이상 계약직으로 요직에 배치했다”며 “퇴직해서도 교육원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람들에게 전부 보직을 줄 수 있도록 청탁을 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앞서 원 전 원장은 임명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의 신임을 등에 업고 무차별 인사를 단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국정원의 한 전직 고위간부 B씨는 “원세훈 원장이 취임하면서 국정원의 인사가 헝클어지고 기강이 엉망이 됐다”고 개탄했다. 그는 “원 전 원장이 데려온 사람이 인사전횡을 저지르는 바람에 멀쩡한 간부 여러 명이 옷을 벗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의 경우 자신이 단행한 인사 가운데 하나가 청와대의 견제를 받기는 했지만 비교적 공평한 인사가 이뤄졌다는 것이 A 의원의 설명이다. 정치 불개입을 실천할 수 있는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A 의원은 “이 원장은 모나지 않는 성품과 업무추진 능력으로 야당 정보위원들에게도 호감을 사고 있다. 셀프개혁이 성공할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이 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도 무난히 통과했다. 정보위원회가 인사청문회 경과보고서를 채택할 때 야당은 ‘부적격’ 의견을 달기는 했지만 큰 반대는 없었다. 과거 국정원장들이 인사청문회마다 야당의 거센 공격을 받았던 일과는 사뭇 다르다.

남재준 전 원장이 취임할 때도 인사청문회가 파행을 거듭한 끝에 가까스로 마무리됐다. 원세훈 전 원장에 대해선 여당이 일방적으로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채택하는 바람에 야당이 분통을 터트렸다.

이 원장과 공직생활을 함께 한 정치권 인사 C씨는 “이병기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큰 무리수를 두지 않으면서도 국정원의 셀프개혁을 차곡차곡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ilyo@ilyoseoul.co.kr 

류제성 언론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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