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일제강점기 때보다 제 가치를 인정 못 받는 우리 문화재”
[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일제강점기 때보다 제 가치를 인정 못 받는 우리 문화재”
  • 조아라 기자
  • 입력 2014-06-23 16:31
  • 승인 2014.06.23 16:31
  • 호수 1051
  • 6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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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골동상이 많아진 일제강점기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도시에서도 우리 도자기와 목칠기 등을 팔아 재미를 본 일본상인들이 있다. 이들은 자전거포와 라디오, 레코드기계 등 근대 기구를 파는 소상공인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대전 근처의 시골 마을에서 농부가 논일을 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때마침 큰 비가 온 뒤라 작은 도랑 같은 개울을 건너기 어려워 그는 잠깐 쉴 겸 앉아서 세차게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새파란 작은 오리새끼 한 마리가 물살에 휘말려 동동 떠내려 왔다.

농부가 하도 신기해 쫓아 내려가면서 물길 속으로 들어가 오리 새끼를 움켜잡았다. 자세히 살펴보니까 사람이 만든 푸른색 도자기 오리였다. 농부는 이 오리가 무슨 조화가 있겠다 싶어 품에 숨겨 집으로 돌아왔다. 오리가 귀물 같은데 농부로서는 어쩔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대전에 있는 일인 가게에 가면 귀물을 팔수 있을 것 같아 대전으로 떠났다. 대전의 한 자전거포를 찾은 농부는 주인에게 오리를 보여줬다. 주인은 농부에게 황소 한 마리 값을 주고 오리를 샀다. 그리고 일인 자전거포 주인은 귀물 중에 귀물에 소문이 나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 그길로 자전거포를 팔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푸른 오리가 바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74호 청자오리 연적이다.

이 오리연적은 일본으로 건너간 다음 영국인 변호사이자 일본에서 활약하던 고려 청자 명품수장가로 유명한 개비스의 소장품이 됐다. 개비스는 동경에서 20년 가까이 고려청자 명품만을 수집한 사람으로 그의 수집품은 질이 매우 높았다. 간송 선생은 개비스의 소장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 그의 소장품을 자신이 수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개비스가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소장품인 고려청자를 일괄 처분한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를 듣고 간송 선생은 1936년 2월 26일 동경으로 갔다. 그는 개비스의 청자들을 보고 청자 22점의 값에 대한 1차 가격협상에 들어갔다. 그는 55만 원이라는 거금을 제시했다. 이 금액은 서울의 기와집 550채를 살 수 있는 돈이다. 당시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은 1000원이었다. 간송 선생이 서울로 돌아오고 개비스가 서울로 와서 최종협상한 결과는 명품청자 20점에 40만원이었다. 이는 기와집 400채의 값이었다. 그때 선생의 나이 32세였다. 간송 선생이 우리 전통문화재를 사랑하고 이를 수집해 보존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얼마나 크고 굳세었는지 짐작가게 한다. 간송 선생은 20점의 국보급 청자를 안전하게 가져오기 위해 여객비행기를 전세 냈다.

지금 우리 전통 문화시장과 비교되는 상황에서 이는 위대한 거래라 칭할 수 있다. 또 당시는 일본 관헌이 우리나라와 문화를 말살하려고 일거수일투족을 매의 눈으로 감시하던 때였다. 그러니 선생이 한 일은 크게 보면 위험을 무릅 쓴 나라사랑이요 독립운동이다. 작게 보아도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아끼고 수집하려는 집념이 참으로 위대하다.

당시 간송 선생이 지불한 고려청자 20점에 40만 원은 한 점당 2만 원 셈이다. 2만 원이면 당시 기와집 스무 채 값이다. 요즘 아파트 최소 시세로 환산해도 1200억 원이고 그러면 한 점당 60억 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요사이 우리나라 고미술품 시장가격(평가가격)은 과연 어떤가. 아마 지금보다 오히려 조선시대와 일제 침략시대가 제대로 된 평가 가격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IMF를 겪고 난 다음 우리 고미술의 가치는 절하됐다. 거래도 한산해 져서 지금은 그 평가가 최저가 됐다. 거래도 아주 한산하다.

현재 우리 주요 문화재의 가치와 그 값은 상인이나 원매자가 매수자와 절충 합의해서 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매자(수장가), 즉 사려는 사람이 정한다. 다시 말하면 사려는 원매자(수장가)가 제시한 값에 팔려면 팔고 말려면 말라는 식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원매자가 30억 원에 팔고 싶다고 상인을 거쳐 거래가 시작되면 사려는 사람이 머뭇거리며 몇 달씩 끌다가 안 사기가 일쑤다. 원매자가 30억 원을 호가한 것의 값을 깎아서 잘하면 10억 원이요 더 깎으면 5~6억 원이면 사겠다고 흥정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백자청화동채투각운룡문슬형연적

▲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연적은 문방사우의 하나이자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신분 표상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분청사기와 백자로 제작됐지만 남아있는 수량은 많지 않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양반 수의 증가와 상품경제의 발달로 제작 수량도 증가했다. 특히 19세기 후반 정조대 이후에는 각종 동물과 식물, 산수를 본뜬 형태에 다양한 채색과 장식 기법이 충동원 된 연적들이 제작돼 당시 기교품을 선호하던 사치풍조를 반영했다.

19세기 들어서는 더욱 다양한 형태와 장식의 연적이 수요층의 기호를 반영하며 다량으로 유통됐다. 이 연적은 기교를 중시하던 당대의 도자 제작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연적은 기능보다는 장식을 우선으로 만들어졌다. 투각으로 문양을 장식하고 그 위에 청색과 홍색 두 가지 채색을 더했다. 받침과 원추형 몸체, 삼사형 내부를 접합했다. 몸체는 발톱 3개의 용과 영지형 구름이 투각됐다. 용의 비늘과 얼굴은 정교한 청화선묘와 채색, 조각이 어우러져 장식미의 극치를 나타냈다. 역동적인 머릿결을 뒤로 날리고 그 안에는 촘촘하게 고리 모양 문양이 청화로 선묘됐다. 용의 눈동자와 이빨, 뿔 등도 정교하게 표현됐다. 청화 발색은 농담도 적절하고 번짐도 없이 우수한 편이다. 발톱의 수가 3개에 상대적으로 커다란 얼굴 형태 등은 19세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용의 모습이다. 영지형 구름은 큼직하게 투각돼 몸체 좌우와 상면에 배치됐다. 구름 사이는 동화로 채색돼 옅은 분홍색을 띠고 있다. 이처럼 청화와 동화를 동시에 사용해 연적을 장식하는 경우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돼 19세기 이르면 그 수량도 증가했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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