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사람들 배불리는 것이 나의 행복”
“배고픈 사람들 배불리는 것이 나의 행복”
  • 이지혜 기자
  • 입력 2014-01-20 10:28
  • 승인 2014.01.20 10:28
  • 호수 1029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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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요양시설 소자의 집 ‘배중희 원장’
▲ 소자의 집을 30년 동안 운영하고 있는 배중희 원장

[일요서울|이지혜 기자] 차가운 겨울바람에 몸도 마음도 움츠러드는 요즘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사람이 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바로 아픈 노인들을 보살펴 주는 소자의 집의 배중희(77·여) 원장이다. 배 원장의 선행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80년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녀는 우연히 교도소 봉사활동을 다녀온 뒤 자신의 집을 팔고 갈 곳 없는 출소자들을 위한 집을 지었다. 경기 용인시 이동면에 위치한 ‘소자의 집’의 시작이었다. 현재는 10여 명의 중증장애노인들이 생활하고 있다. 배 원장은 “집 없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말했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용인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가면 밭이 많고 인적이 드문 작은 동네가 나온다. 그곳에 조그만 벽돌집 소자의 집이 있다. 예수님처럼 모신다는 뜻을 가진 ‘소자의 집’. 배 원장은 “뜻이 너무 좋아서 이름으로 삼았다”며 미소를 지었다.

교도소 성경 가르치기 30년 전부터 봉사

누구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실천으로 이어지기는 힘들다. 소자의 집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이야기는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 당시 43세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배 원장은 다니던 성당을 통해 우연히 안양교도소에 무기수들의 ‘하루 엄마’로 봉사활동을 가게 됐다. 그녀가 상담을 맡은 수감자는 물건을 던져 사람을 죽인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는 면회도 오지 않고 소식도 없다고 했다.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이지만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던 배 원장은 고민 끝에 교도소에서 성경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모두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남자도 힘든데 여자가 어떻게 하느냐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배 원장은 포기하지 않고 1년을 설득한 끝에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배 원장의 교도소 성경봉사활동은 시작됐다. 그때 배 원장과 정이 든 수감자가 출소하면 같이 살자고 말을 건넸다. 전과자라는 이유로 부모형제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며 함께 살기를 소원했다.

“전과자는 다 나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갈 곳이 없어서 빵 하나 훔쳐 먹으면 범죄자가 되더라. 그런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배 원장의 말에 남편은 “그럼 우리 집을 팔아서 시작하면 되겠다”고 대답했다. 그길로 배 원장은 당시 서울에 있던 집을 팔았다. 그리고 집을 판 돈을 가지고 용인에 땅을 구입했다. 성당에서 모금을 받아 집도 지었다. 이후 그곳에서 갈 곳 없는 출감자들을 먹이고 재우며 보살폈다. 소자의 집에 모인 사람은 금방 50명이 넘었다.

그러나 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장 식비가 문제였다. 이러다 ‘굶어 죽겠다’는 생각에 배 원장은 안쓰는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젊은 청년들과 봉사자들이 농사를 지었으나 쌀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배 원장이 여기저기 쌀을 얻기 위해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성당, 교회, 가정집 가리지 않고 모두 돌아다니며 소자의 집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노력했다. “쌀과 된장, 간장, 반찬 등 가리지 않고 부탁해서 받아왔지요. 당시에 식비가 얼마나 들었는지 알지도 못해요. 그냥 막 얻어다 먹었으니까…” 옛날 일을 회상하는 배 원장의 표정만 봐도 당시 힘들었던 상황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약국에서 노인을 돌보라는 소리를 들었다. 약사는 배 원장에게 “맨날 쌀 걱정하는데 차라리 노인을 맡아라. 그럼 그 자식들이 쌀값은 줄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 말을 계기로 소자의 집은 현재와 같은 노인요양시설로 변모했다.

▲ 용인시 처인구 묵리에 위치한 소자의 집
배고픔 참아가며 전차 타고 학교 다녀

배 원장은 아직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 있던 1938년에 태어났다. 8살에 광복을 맞고 13살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전쟁 당시 경북 안동에 살던 배 원장은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보따리만 들고 피난을 왔으니 학교는 다닐 수 없었다.

당시에는 피난민을 위한 야학이 있었다. 배 원장은 그곳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함께 야학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은 한명씩 학교로 옮겨갔다. 그때마다 배 원장은 그들을 부러워하며 몰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안동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던 배 원장은 우연히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었지만 입학을 시켜준 것이다. 알고 보니 그 학교는 정식 인가가 없는 학교였다.

배 원장은 선생님을 찾아가 “나는 앞으로도 계속 배움을 이어나가야 하는 사람이다.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선생님의 도움으로 정식 인가를 받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다녔다고 해서 배 원장의 생활이 여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도장 파는 일을 하는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당시 배 원장은 새어머니 밑에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학교에 가 수업을 받았던 것이다. 배 원장은 “수업이 끝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너무 배가 고팠다”라며 “그러다보니 집이 없고 배고픈 사람에게 따뜻한 밥을 주는 것이 소원이 됐다. 그때 기억으로 인해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배는 무척 고팠지만 배 원장의 학업에 대한 열정은 꺼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리 힘들어도 학교는 다녀야 한다. 고등학교는 꼭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정형편은 어려웠다.

결국 배 원장은 수예품 점에서 일을 받아 수를 놓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전차비를 마련해 학교에 다녔다. 힘든 형편에 등록금도 1년 넘게 밀렸지만 마음씨 착한 담임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단 한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배움의 열정은 나이가 예순이 넘어도 꺼지지 않았다. 소자의 집을 노인요양시설로 바꾼 배 원장은 요양보호사, 사회복지사,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차례로 취득했다.

사실 자격증 취득의 배경은 힘든 생활에 있었다. 국가에서 보조금은 나왔지만 그 돈으로는 노인들의 식비와 보험료를 내기도 빠듯했다. 그 외 전기·가스 등 생활비는 해결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현재 배 원장은 매달 나오는 남편의 연금으로 겨우겨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보통 노인요양시설은 한 사람당 수십 만 원의 돈을 받는다.

그러나 소자의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형편이 어려워 10만 원도 제대로 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 원장은 한 번도 소자의 집 입소를 원하는 사람을 거절한 적이 없다. 그녀는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손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지난달에도 400만 원 적자가 났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 배 원장은 나가는 돈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본인이 직접 요양보호사,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다. 배 원장은 “내가 복지사를 하면 월급을 줄일 수 있으니 1석 2조라고 생각하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런데 내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더라”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시절 소자의 집 운영으로 인해 자식들에게 신경을 많이 못써준 것이 가장 미안하다고 말하는 배 원장에게 소자의 집을 시작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배 원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후회한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10년 전 남편과 사별한 배 원장에게 소자의 집 식구들은 가족과 다름없다. 그녀의 삶이 지속되는 한 어려운 노인들은 소자의 집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녀가 지금과 같은 건강한 모습을 오랫동안 간직하기를 바란다.

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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