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서른여덟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남자한테 참 좋은데~’ 광고 카피로 1200억 원 매출 신화를 만든 김영식의 ‘천호식품’이다.
인생 바꾼 딸의 한 마디
“아빠 우린 왜 가난해?”
1982년 김 회장은 부산 남구 대연동의 비좁은 골목에 있는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4만 원짜리 단칸방에 살았다. 식구는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이었다. 겨울나기가 무서울 만큼 쌀과 연탄을 장만하는 것이 급선무인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집에서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했다. 그런데 그날 김 회장이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빠,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해?”하고 울먹이며 따져 묻기 시작했다.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너희 집은 왜 이렇게 작아? 방이 하나밖에 없어?”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충격을 받은 김 회장은 그날 지금의 인생보다 10m를 더 뛰어 최대한 빨리 부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김 회장은 스물네 살에 ‘일일공부’라는 배달 학습지 지국을 운영했고 스물다섯 살에는 신발 깔창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다.
그렇게 작은 장사를 하다가 서른 살이 된 1980년 비로소 큰돈을 만지기 시작했다.
‘세계 금연의 해’였던 것을 사업 아이템으로 삼고 ‘담배 끊는 담배’, 즉 금연파이프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김 회장은 당시 타고 다니던 현대자동차의 포니 원을 150만 원에 처분해 사업 자금으로 마련했다. 당시 포니 원은 국산 최고급 차로 가격이 약 600만 원이었다.
김 회장은 자금을 마련한 뒤 직접 공장을 돌아다니면서 금형을 맞추고 각종 재료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돈이 모자랐다. 파이프 금형이 문제였다. 새로 금형을 떠서 만들기에는 돈이 턱없이 부족해 이미 만들어진 제품을 구입하기로 하고 부산에 있는 공장들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볼펜 자루를 만들었다가 길이가 맞지 않아 납품을 하지 못하고 창고에 쌓아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됐다. 김 회장은 그것을 싼값에 인수해 절단기로 잘라 금연 담배의 파이프로 사용했다.
어렵사리 제품을 완성한 다음, 파는 일이 남았다. 금연파이프를 팔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김 회장이 먼저 담배를 끊는 것이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금연 사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업을 위해 그 자리에서 담배를 끊었다. 흡연의 해악과 금연 방법을 담은 차트도 만들었다. 쾌적함을 상징하는 하얀 모자를 쓰고 하얀 장갑을 낀 채 ‘금연 합시다’라고 적힌 리본을 가슴에 달았다. 그렇게 금연 홍보 요원으로서 모든 것을 갖추고 임대한 판매용 차량을 몰고 부산 충무동 오거리로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핸드 마이크를 들고 차트를 넘겨가며 금연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3시간 30분 만에 무려 39만8000원 어치를 팔았다. 당시 대기업 신입 사원 초봉이 30만 원도 안됐던 것을 생각하면 대박을 친 셈이다.
그렇게 이틀 동안 팔고 다녔더니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금연파이프를 팔겠다는 업자들이 달려들고 전국적으로 금연 사업에 불이 붙었다. 그렇게 6개월 동안 6000만 원 이상의 이익을 남겼다. 당시 대학 등록금이 50만 원이 채 안 되었으니 무척 큰돈이었다.
그렇게 큰돈을 만지게 되자 그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는 스스로 건방 기가 흐르고 겁이 없어져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과욕에 파산…
재기 가능했던 이유
김 회장은 사업을 더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장난감과 주방용구 사업을 한꺼번에 시작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업 확장에 너무 많은 돈을 쏟아 붓는 바람에 순식간에 무일푼이 됐다. 돈을 너무 빨리 번 탓에 자만심이 생겼고, 그것이 지나쳐 망치로 흠씬 얻어맞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잡아 또다시 직접 판매에 나섰다.
김 회장은 그 때 전국 각지를 거의 다 돌아다녔다. 연고도 없이 시외버스를 타고 아무 데나 가서 팔았다. 판매는 버스 안에서부터 시작됐다. 버스를 타면 우선 물건을 살 만한 사람을 물색해 그 옆에 앉았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물건을 팔았다. 그러면 교통비와 식비는 떨어졌다.
버스에서 내리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 사정을 설명했다. 김 회장의 물건을 살 만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한 뒤 즉시 찾아가 대리점 계약을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 버스 안에서 다시 옆 사람에게 물건을 팔았음은 물론이다.
대리점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 사무실을 방문하면 대개 실망하는 반응을 보였다. 겨우 6.6㎡(2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사업을 한다고 하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또 열심히 설득했다. 그러면 대부분 수긍을 하고 정식 계약이 성사됐다. 김 회장은 “열정적인 모습을 보고 믿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이렇게 발로 뛰면서 사업 기반을 만들어 서른네 살이던 1984년, 마침내 천호식품을 설립했다. 이후 김 회장은 저주파 치료기 생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건강 사업을 해오고 있다.
성공한 사업 중 대부분은 창업자 자신의 직접 체험에서 탄생한다. 간절한 체험으로 만들어진 사업은 쉽게 망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창업자들의 불타는 열정과 사업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천호식품이라는 건강식품 회사 역시 김 회장의 체험에서 비롯됐다.
1986년 여름, 그는 바다낚시를 가기 위해 장비를 구입하고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그렇게 마신 술은 과음으로 이어졌고 만취 상태로 운전대를 잡았다.
차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음주 단속이 심하지 않았고, 무사고 경력 18년이라는 생각에 큰소리를 쳤지만 사고를 내고 말았다. 차가 전봇대를 들이받은 것이었다. 게다가 왼쪽 팔이 떨어져 제멋대로 덜렁대고 있었다.

대박 아이템 ‘달팽이’
탄생은 ‘깁스’때문
그 후로 김 회장은 한동안 깁스를 하고 지내는 신세가 됐다. 동물의 뼈는 부러져도 시간이 지나면 붙는 속성이 있지만 그의 팔은 어찌된 영문인지 3~4개월이 지나도 붙지를 않았다. 6개월까지 그 상태가 계속되자 의사는 좀 더 지켜본 뒤 수술을 하자고 말을 할 정도였다.
그 때 누군가가 “뼈 붙게 하는 데는 달팽이가 최고다”고 귀뜸해줬다. 수술을 앞둔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팽이를 달여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거짓말같이 뼈가 붙는 게 아닌가.
그리고 2년 뒤 어느 날, 그는 신문 속에서 ‘자본주 구함’이라는 두 줄짜리 광고를 발견했다. 달팽이 농장을 경영하는 사람이 식당을 해 보겠다며 자본주를 구하고 있었다. 그는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광고를 낸 농장주를 만나기 위해 김해시로 단숨에 달려갔다. 농장주는 2000㎡(약 606평) 땅에 300㎡(약 90평)정도의 건물 3개 동에서 달팽이를 키우고 있었다. 달팽이는 잘 키우고 있지만 판로가 없다고 했다. 그는 달팽이 생산 능력 등을 알아본 뒤 바로 계약을 체결했다. 농장은 천호식품이 인수하고 농장주는 월급과 인센티브를 받고 농장장으로 일하는 조건이었다.
이후 천호식품은 본격적으로 달팽이 사업을 시작했다. 먼저 분양 광고를 내 당시 용인의 H산업에도 달팽이를 분양했다.
H산업보다 뒤늦은 처지에서 차별화 전략으로 펼칠 수 있는 것은 가격 파괴와 유리한 분양 조건밖에 없었다. 그는 종패를 5000원에 분양하고 6.6㎡(2평) 정도의 하우스를 지어줬다. 또 상자와 온도계를 비롯해 양식에 필요한 장비 일체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5000원 조차 전부 받는 것이 아니라 2500원 만 받고 나머지는 나중에 키운 달팽이로 받기로 했다.
‘50만 원 투자로 6개월 후부터 월 50만 원 정도 수입. 가정 옥상에서도 가능’이란 문구로 부산일보 2단 통 광고를 냈다.
이후 천호식품의 전화에는 불이 났다. 첫날에만 거의 700여 통의 전화가 왔고 200명이 설명을 들으러 왔다. 점심 먹을 시간도 부족할 만큼 사람들이 밀려들었지만 막상 달팽이 종패를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신뢰감이 형성되지 않는 회사가 많이 입주해있던 당시 사무실 위치로 인해 신뢰를 얻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사무실을 더 깨끗한 곳으로 옮겼다. 홍보용 비디오테이프도 만들었다. 김 회장과 농장장이 함께 설명하는 50분짜리 홍보 비디오였다. 아이디어는 적중했고, 직접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사무실 직원이 틀어주는 홍보용 비디오를 보고 60~70%의 인원이 가계약을 했다.
이처럼 초창기의 천호식품은 많은 이익을 얻는 쪽보다 많은 판매를 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 전략은 맞아떨어졌고, 부산에서 3개월간 달팽이를 분양하고 대구로 옮겨 갔다. 이후 대전과 서울에서도 지사를 낼 만큼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1997년 IMF를 만나면서 천호식품 김 회장은 다시 한 번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는 유명 식품 회사로부터 납품 중단 통보를 받고, 사업 가맹자들이 파산했다. 자살까지 생각한 그 순간 그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바꿔 줄 전화벨이 울렸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시은 기자>
<출처=10미터만 더 뛰어봐! 中│김영식 지음│21세기북스>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