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랙컨슈머 응대·보상비 고스란히 고객에게로
막무가내식 항의로 병드는 서비스 담당 직원들
블랙컨슈머들이 제기하는 민원은 일반인들의 상식을 초월한다.
최근 A홈쇼핑은 블랙컨슈머 B씨 때문에 회사가 고소를 당할 뻔했다. B씨는 40대 가장으로 일반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었다. 유부남인 B씨에게는 내연녀가 있었다. 어느날 B씨가 홈쇼핑을 보던 중 내연녀에게 줄 상품을 골라 주문한 뒤 결제했다. 문제는 이 상품이 내연녀가 아닌 B씨의 아내에게 배달이 되면서 시작됐다. 배달사고가 난 것이다. A홈쇼핑에서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돼 있던 B씨의 집 주소로 상품을 배달한 것이다. B씨가 따로 배송지를 수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밖의 상품을 받은 아내는 기분이 좋았다가 내용물을 보고는 자신에게 온 상품이 아니란 것을 알았고 곧 B씨에게 연락해 누구의 것인지 이것저것 캐묻기에 이르렀다. 발뺌을 하던 B씨는 결국 불륜 사실을 고백했다.
사건의 흐름만 보면 분명 배송지를 수정하지 않은 B씨의 잘못이다. 하지만 B씨는 A홈쇼핑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고소하겠다고 나섰다. B씨는 A홈쇼핑사에 선물을 잘못 배달해 불륜 사실이 발각돼 이혼과 함께 가정이 파탄나게 됐으니 정신적인 피해보상을 하라고 요구했다. 피해보상금도 1000만 원이 넘는 큰 액수를 불렀다. 자신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기업을 상대로 엄포를 놓던 B씨는 A홈쇼핑이 적극적으로 나오자 꼬리를 내렸다.
이벤트 당첨될 때까지 주문 당첨 후에는 주문 취소
홈쇼핑계에서는 ‘추첨남’이라는 블랙컨슈머의 행태가 유명하다. 홈쇼핑을 자주 이용하는 추첨남 C씨는 홈쇼핑에서 ‘1+1 이벤트’ 등을 진행할 때 이벤트가 당첨될 때까지 전화로 자동주문을 한다. 자동주문이 10건이든 100건이든 상관없이 주문하고 당첨되면 그 한 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자동주문을 모두 취소하고 환불을 요구한다. 이벤트 상품 한 개를 더 받겠다고 하는 행동치고는 지나치다.
금융권에서는 ‘1원 민원’이 유명하다. 은행 직원이라면 한 번씩 듣거나 경험해 봤을 내용이다. D은행 직원 중 한 명은 적금 만기가 돌아온 고객에게서 “최종 잔액이 109원으로 끝나는데 왜 110원을 주느냐”고 따지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은행이 1원 거래를 하지 않아 1원을 더 얹어 10원을 드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고객은 “내가 거지냐, 1원을 더 주면 기분 좋아할 줄 알았냐. 잔액대로 정확히 달라”며 항의했다.
이 고객은 전화도 부족해 결국 매장에까지 직접 찾아왔고 고성을 지르고 소란까지 피웠다. 급기야 “일반 직원하고는 이야기가 안 되니 지점장 나와”라고 해 지점장까지 불려 나왔다. 이 고객은 지점장이 나와 정중히 사과하고 상품권을 주자 조용히 사라졌다.
10년 지난 옷도 무료 애프터서비스?
E전자는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제품 커버를 증정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신제품 출시 행사인 만큼 한정 수량을 준비해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한 고객이 왜 자신에게는 커버를 주지 않느냐고 항의를 해 왔다. E전자회사에서는 이벤트 행사인 만큼 한정 수량이었고 선착순으로 지급됐다고 설명했으나 이 고객은 이해를 하려 하지 않았다. 이 고객이 원하는 것은 제품커버였다.
아무리 설명을 하고 이해를 시켜도 고객이 수긍하지 않자 E전자에서는 유가인 제품커버를 무료로 고객에게 주기로 하고 택배로 물건을 보냈다. 하지만 얼마 후 이 고객으로부터 또 항의전화가 왔다. 택배를 받아 상자를 열어보니 커버가 3개 들어 있었단다. 왜 1개가 아닌 3개를 줬냐며 따지는 고객에게 담당자는 할 말을 잃었다.
아웃도어 의류를 판매하는 F사는 AS에 대한 민원을 많이 받는다. 그중에 가장 황당한 것이 제품을 산 지 10년이 지났는데 무료로 AS를 해 달라고 찾아오는 경우다. F사 입장에서는 자사의 제품을 오랫동안 입어 줘 감사하지만 10년이나 지난 옷을 무료로 AS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품 디자인 베끼는 블랙컨슈머 등장
블랙컨슈머들의 행태는 이뿐만이 아니다. 여성의류를 판매하는 G사는 일명 ‘카피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 카피녀는 G사에서 신제품이 출시되면 제일 먼저 구매하는 손님이다. 문제는 이렇게 제일 먼저 구매해 간 신상품을 며칠 뒤 꼭 환불받는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이 카피녀는 신상품을 구매한 뒤 그 옷의 디자인을 똑같이 복사해 짝퉁 의류를 만들어 판매하는 디자이너였다. 카피녀의 이런 행동은 불법으로 G사의 매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결국 G사는 이 카피녀를 찾아 나섰다. 이러한 사실을 안 카피녀도 최근에는 제품 환불 시 본인이 아닌 알바생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피부트러블 났다며 진료비·위로금 요구
화장품 제조·판매회사는 블랙컨슈머들의 행동에 더욱 민감하다. 화장품을 판매하는 H사는 고객들로부터 피부트러블 때문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민원을 많이 받는다. 화장품이란 것이 쓰는 사람의 피부 타입과 상태에 따라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민원은 끊이질 않는다.
최근 H사에 새롭게 출시한 화장품을 사용하다가 피부 트러블이 나 피부과에 다니고 있다고 항의하는 고객이 있었다. 화장품 사용 초기 피부트러블이 나면 사용을 중단하라고 권하고 있지만 소비자들이 자사의 화장품을 쓰다가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화장품 회사는 힘을 쓸 수가 없다.
화장품이란 것이 워낙 여성들에게 필수품이기도 하거니와 대부분 친구나 사용후기를 보고 구매하는 경우가 많아 악성 민원이라도 무시했다가는 매출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결국 H사는 이 고객에게 피부과 진료비 30만원과 위로금을 포함해 100만원을 주고 마무리했다.
SNS 활성화가 가져온 그림자
블랙컨슈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SNS와 시민단체 활성화가 한몫하고 있다. 과거에는 소비자 피해를 알릴 수 있는 창구라고는 언론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의 SNS가 활성화돼 있고 소비자 보호를 위한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블랙컨슈머들이 제일 많이 하는 소리가 “SNS에 올린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SNS는 그 특성상 정보의 파급력이 크고 전파력이 매우 빠르다. 글을 올리고 1분만 지나도 수십, 수백 명이 같은 내용을 공유할 수 있다. 블랙컨슈머들이 올리는 불만사항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기업들의 브랜드 이미지는 깎일수밖에 없다.
블랙컨슈머 판치는 세상기업들이 만들었다
블랙컨슈머가 마음 놓고 큰 소리칠 수 있게 된 데에는 ‘소비자가 왕’인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고객을 현혹해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 기업들은 ‘100% 고객이 만족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밖에 없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민원인들조차 어르고 달랠 수밖에 없다. 결국 제값 주고 물건을 산 사람들만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터넷에는 ‘악성민원 제기하는 법’ ‘100% 상품 교환 받는 비법’ 등의 게시물과 성공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한 전자회사 담당자는 “블랙컨슈머들의 행태는 솔직히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기업의 입장에서 고객의 민원을 무시하는 데 따른 비판적인 여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결국 블랙컨슈머도 고객이지 않으냐”며 한탄했다.
따지고 보면 블랙컨슈머로 기업이 입는 피해보다 기업들의 횡포로 소비자의 피해 사례가 훨씬 더 많다. 말도 안 되는 허접한 상품을 화려하게 포장하고 광고해 소비자들에게 떠넘기고 사라지는 사례, 유명 브랜드를 내건 대기업까지 가세해 함량 미달의 상품을 쏟아내는 사례 등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의식과 불안을 안겨왔다. 결국 자업자득이다.
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