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
“기다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
  • 정은혜 
  • 입력 2005-11-01 09:00
  • 승인 2005.11.0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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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상황,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식물인간’인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남편이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최종길(35)씨. 그가 세간에 알려진 것은 지난 2002년 SBS<세상에 이런 일이>에 이어 KBS-2<인간극장>에 출연 하면서부터다. 진정한 부부애, 가족의 소중함, 헌신적 사랑, 희망의 이유, 삶에 대한 긍정 등은 지난 3년여간 아내의 병상을 지켜온 최씨의 삶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지금도 그는 아내가 병상을 훌훌 털고 일어날 것이란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고 있다. 최씨는 최근 자신의 애틋한 사연을 한권의 책(‘사랑한다 더 많이 사랑한다’)에 담았다. 이 책은 최씨의 간절한 바람과 아내를 향한 지극한 사랑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어 주위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최씨는 충남 아산에서 나고 자랐다. 낯가리고 사람 사귈 줄 모르는 그는 마냥 ‘순박한’ 청년이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도 없었다. 가족 외에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여자에겐 어이없게 실연 당했다. 첫사랑에 실패한 후, 전보다 훨씬 심한 ‘외톨이’가 돼버렸다.

정동진에서 프로포즈

아내 김혜영(35)씨와의 인연은 최씨의 외숙모에 의해 이뤄졌다. 내키진 않았지만 외숙모 체면을 생각해서 맞선 자리에 억지로 나갔다. 김씨는 예쁘진 않았지만 순하고 다정한 얼굴에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김씨는 ‘불’같진 않았지만 ‘물’같이 최씨 마음속에 서서히 스며들어갔다. 최씨가 첫사랑의 ‘불길’에 데인 상처를 ‘물’로 적셔준 셈이다. 최씨의 프로포즈는 정동진 해돋이여행 도중 성사됐다.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진 모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다는 약속은 지킬게. 둘 중 한 사람이 죽기 전까진 반드시 이 약속 지킬거야.”결혼하고 3년이나 지났을까.

최씨의 ‘약속’을 시험이나 하듯, ‘행복 끝 불행 시작’이 됐다.머리가 자주 아프다던 김씨는 뇌출혈로 쓰러져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다. 두개골을 드러내는 감압수술을 포함해 네 번의 수술을 받아왔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 못한 상태.기적을 바라는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의식이 돌아온다 해도 20%의 기능만이 회복된다고 한다. 그 일말의 가능성을 위해 최씨는 그동안 어렵게 모아둔 돈을 모두 병원비로 썼다. 담당의사, 형, 누나, 처남, 처제 등 돈을 융통해줄 만한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둘째 출산

그렇게 자존심을 버려가며 당장 급한 불은 꺼 나갔다. 하지만 매달 병원비는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김씨의 한달 병원비는 무려 천여만원. 더 이상은 역부족, 한계에 다다랐다. 이 무렵, 김씨가 의식없는 몸으로 둘째 태웅이를 출산했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자연분만을 한 것은 유례없던 일. 이는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화제거리’였다. 최씨는 아내의 적나라한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낸다는 게 못할 짓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당장 ‘돈’이 급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내를 살리는 방법은 ‘방송출연’뿐이었다. 그래야 ‘출연료’라도 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방송이 나간 직후 여기저기서 후원금을 보내줬다.

“그 분들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희는 없었을 거예요. 밥 먹는 건 잊어도, 그 분들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거예요”라며 최씨는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후원금은 얼마 안가 끊겼고 다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됐다. 어쩔수 없이 아내를 집으로 데려온 후 최씨는 1여년 정도 방황했다. ‘지독한 우울증’,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연한 기다림’, 기다려봐야 소용없다는 ‘불안감’ 때문. 힘들 때마다 ‘삶의 원동력’이 돼 준 건 무엇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최씨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내와 보낸 추억 회상, 태란이, 태웅이, 그리고 어머니요. 사랑하는 제 가족을 보며 ‘에너지’를 얻습니다.” 현재 태란이, 태웅이는 모두 건강한 아이로 자라고 있다. 1,100그램, 812그램의 미숙아로 태어난 그들이지만, 할머니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에 지금은 더없이 밝은 모습이다.

다만 네 살배기 태웅이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약간 발달이 느리다는 점이 안타까운 부분. 그러나 태웅인 이 집안의 ‘재간둥이’란다. 할머니가 아프면 ‘애교’도 부리고 ‘위로’도 할 줄 안다고. “10년, 20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어요. 완전히 낫진 못하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는 한 기다릴 거예요. 포기할 거였으면 시작도 안했습니다” 라며 최씨는 눈에 거듭 힘을 주며 말했다.아내가 깨어난다면 ‘말없이 한없이 울 것만 같다’는 최씨. 서로 아픔을 나누며 새 희망을 품어가는 이들의 모습은 ‘가족’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가는 요즘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 “기적을 믿는다”

- 지금 아내의 상태는.
▲더 나빠질 게 없다. 병원도 기적만을 바란다며 손 놓은지 오래다. 그러나 네 번의 수술을 하면서 반응이 더 무뎌진 것 같다. 전에는 가끔 말귀를 알아듣고 눈도 깜빡였는데 지금은 초점도 전혀 없는 상태다.

- 아이들의 반응은.
▲아이들이 ‘엄마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럴 때마다 ‘압력’을 가해 일부러 엄마와 말을 붙인다. 시키지 않아도 딸 태란이가 엄마한테 인사하고 말 거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 또래 친구보다 발달이 더딘 아들 태웅이는 할머니만 졸졸 따라다닌다. 할머니 말이라면 무조건 다 듣는다. 잠시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 염려되는 부분이 많다.

-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없다. 남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다만 병간으로 쇠약해지신 어머니를 볼 때 가슴이 미어진다. 요즘 들어 부쩍 불면증에 시달리신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잘 정도. 어머니의 흰머리와 주름을 전부 내가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께 가장 미안하고 가장 감사하다.

- 주변에서는 뭐라고 하나.
▲‘단념’하라고 한다. 병원측도 손 놓은지 오래다. 그러나 ‘기적’을 믿는다. 전에 식물인간으로 17년 동안 지낸 사람이 깨어나 화제가 된 바 있지 않은가. 내 아내도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현재 생활비, 양육비는 어떻게 충당하고 있나.
▲하루 벌어 하루 쓰는 실정이다. 전에는 후원금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없다. 장판까는 일을 하고 있지만 수입이 일정치 않고, 아내 간병하느라 일을 쉬는 동안 그나마 있던 단골도 끊긴 상태다.

- 의학의 발달로 일말의 희망이 보이고 있는데, 아내가 일어나면 해주고 싶은 말은.
▲아무 말 못하고 한없이 울기만 할 것 같다. 생각만 해도 벅차오른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랄 뿐이다.

정은혜  KKeuna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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