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정국인 2012년, 대선에 거명되는 인물들과 현역 국회의원을 포함해 총선에 출마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TV에 얼굴을 비추고 있다.
한 명이라도 더 만나고 악수해야 할 그들이기에 TV에 얼굴을 비추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토론’ 프로그램에서 ‘예능’ 프로그램으로까지 그 범위가 확대됐다는 점이다.
특히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SBS의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이전에 보여주지 않았던 평범한 삶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박 위원장과 문 이사장 등 대권을 꿈꾸고 있는 다른 잠룡들 또한 여건이 허락만 되면 언제든지 토론 프로그램이 아닌 예능 프로그램에 나올 태세다.
항상 일반 국민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던 그들이 TV에 얼굴을 비추는 것에는 분명 감춰진 속내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민들 또한 이런 부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과 다른 모습에 크게 호감을 드러내고 있다.
대권과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는 그들의 TV 프로그램 출연 속사정을 분석해 본다.
“불판을 갈아엎자”는 한마디로 유명해진 노회찬 통합진보당 대변인, 톡톡 쏘는 어투로 상대방을 몰아붙였던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경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해박한 지식과 논리 정연함을 보여줬던 김성식 국회의원, 약간은 다혈질이지만 꼬치꼬치 따지며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여준 최재천 전 의원. 이들은 모두 토론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각인된 ‘인물’들이다.
이들이 출연하면 시청률이 평소보다 높아졌다. 패널로 출연한 이들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면서도 이슈를 제대로 짚어내 시청자들로부터 ‘토론을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됐다.
한동안 국회의원이라면 공중파 방송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야만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런 모습은 남아있다.
하지만 이런 토론 프로그램 이외에 유력 정치인이라면 반드시 출연해야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예능’이다.
박근혜·문재인 예능 출연에 시청자 환호
박 위원장은 인터뷰하기 어려운 인물로 국회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심지어 박 위원장의 속내를 듣기 위해서는 대변인격인 이정현 의원에게 연락을 할 정도이니 그의 출연에 귀추가 주목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차기 대권후보 중 용꿈과 가장 근접해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말을 아꼈던 박 위원장이었기에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박 위원장의 속내에는 그동안 ‘차갑다’는 이미지로 굳어져버린 자신의 이미지를 부드러우면서도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그런 인물로 바꾸기 위해서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현재 한나라당의 쇄신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박 위원장에게는 ‘변화’라는 이미지가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었다.
박 위원장은 ‘힐링캠프’에 출연해 이른바 ‘개념 있는 연예인’으로 통하는 김제동과의 만남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심지어 아이돌 그룹의 노래까지 부르는 등 파격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몇몇 민감한 질문에도 여유롭고 차분히 답해 ‘힐링캠프’를 동시간대 시청률 1위로 끌어올리는 힘을 보여줬다.
방송 후 시청자게시판에는 박 위원장이 출연한 것에 대한 반발도 있었지만 “오늘 나름 재미있게 봤고 다음 주도 궁금하긴 하네요”, “인간적인 모습을 담아낸 것 같아서 흐뭇하게 보았습니다” 등과 같은 소감도 줄을 이었다.
아직까지는 박 위원장에 비해 덜 알려진 문 이사장이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하며 그 속에서 정치적 소견을 밝혀 자신의 이미지를 제대로 부각시켰다. 평소 차분하고 신사적인 면모를 선보였던 문 이사장은 특전사 시절의 사진을 공개해 남성다움을 보여줬으며 이어 격파시범까지 보여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국민들과 대면접촉이 많지 않았던 두 사람은 예능을 통해 인간적인 모습을 충분히 보여줬으며 이를 통해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안철수 교수, 예능 통해 이미지 메이킹 완료
사실 예능으로 가장 성공한 사례는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꼽을 수 있다. 박 위원장의 유력한 야권 대항마로 부상한 안 원장은 2009년 6월 MBC의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의사였으며 안철수연구소의 대표까지 지냈다는 그의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인간적인 모습과 성장과정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시청자들 또한 많았다.
안 원장은 “돈보다 명예가 좋고 명예보다 편안한 게 좋다”라고 얘기하며 소탈한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줬다. ‘무릎팍도사’ 출연 이후 안 원장에 대한 호감도는 급상승했으며 이런 결과는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그가 출연했던 ‘무릎팍도사’가 인기검색어가 될 정도로 예능 프로그램의 위력은 대단함을 보여줬다.
정치적 검증이 아직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안 원장이지만 야권의 유력한 대권 후보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소탈하면서도 욕심이 없는 모습의 바탕 위에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의 ‘아름다운 양보’가 덧씌워지면서 가능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공중파가 아니어도 좋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이 세 사람은 계속해서 국민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다. 그들이 이렇게 관심을 받게 된 부분에 예능 프로그램의 영향이 없다고 반박할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자신이 출연하고 싶다고 해서 출연할 수는 없는 노릇. 따라서 국민들에게 얼굴을 비춰야 하는 인물들은 방송사의 출연요청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방송에 출연해 국민들과 호흡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딴지라디오의 팟캐스트 방송인 ‘나는 꼼수다’(나꼼수)는 이제 공중파 방송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방송에 출연하면 실시간으로 언론에 등장하게 되고, 그들이 말한 내용은 트위터를 통해 전파된다.
민주통합당의 당권을 노리며 치열한 경쟁을 펼쳤던 한명숙·문성근·박영선 후보도 나꼼수에 출연해 많은 이들과 호흡했다. 나꼼수 출연 하나로 그들은 청취자들로부터 환호를 받으며 당권 경쟁에서도 앞서 나갈 수 있었다.
여권의 대권 후보로 꼽히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11일 ‘손바닥’TV’에 출연해 얼마 전 벌어졌던 119상황실과의 통화를 해명했다. 자칫 희화화 될 수도 있다는 불안한 요소가 존재했지만 김 지사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프로그램에 출연해 택시운전을 하면서 느꼈던 소회와 정치인으로서의 김문수를 시청자들에게 보여줬다.
총선주자들도 방송 출연 예외 없어
총선이 당장 90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후보들은 12일부터 방송출연이 금지됐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선거방송의 공정성 보장을 위해 선거일 90일 전인 12일부터 19대 국회의원 선거의 후보자는 보도나 토론 프로그램 이외의 방송에 출연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총선 후보들은 이미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전부터 방송에 얼굴을 비췄다.
무소속인 강용석 의원은 언론과의 인터뷰 외에도 tvN의 ‘화성인 바이러스’에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남자로 출연해 입담을 과시했으며, 김한길 전 의원의 경우 부인인 배우 최명길씨가 ‘개그콘서트’에 카메오로 출연하면서 객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화면에 몇 번 잡히며 총선에 출마하는 것 아니냐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전·현직 국회의원들은 이미 ‘체험, 삶의 현장’과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을 선보이며 지역주민들과 함께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줬다.
나경원 전 한나라당 의원과 전병헌 민주통합당 의원은 2010년 설날에 방영된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해 ‘나씨 아줌마’와 ‘전씨 아저씨’로 불리며 농수산물 시장에서 좌충우돌했다. 국회의원들 외에 장관이나 공사 사장 등 향후 예비정치인으로 분류되는 이들도 체험 프로그램에 등장해 하루 동안 갖은 고생을 했다. 이렇게 흘린 땀은 그들에게는 수년간의 자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작용한다는 판단 때문으로 풀이된다.
생존 위해 방송출연 계속될 듯
299명의 국회의원 중 국민들에게 이름이 각인된 인물은 채 100명이 안 된다.
나머지 의원들은 의정활동을 통해 지역주민들에게 다가서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 그들은 언론에 자주 이름이 거론되고 방송에도 얼굴이 나와야 향후 공천을 보장받을 가망성이 조금 더 커짐을 잘 알고 있다. 당연히 방송 출연에 대한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선호하면서 이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너무 가볍다”, “제발 좀 정치에 신경 써라”, “얼굴만 팔고 다닌다”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대권 잠룡들 또한 이런 지적을 잘 이해하고 있다. 정치인은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요구되기에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이미지 메이킹으로만 비춰질 수 있다는 위험을 그들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당장 선거를 앞둔 잠룡들과 총선 예비후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의미 있는 날이 될 수밖에 없어 다양한 형태의 방송출연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 또한 힘을 얻고 있다.
<전수영 기자> jun6182@ilyoseoul.co.kr
전수영 기자 jun6182@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