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쓰볼 인천’ 구도(球都)의 야구 100년사
‘베쓰볼 인천’ 구도(球都)의 야구 100년사
  • 이수영 기자
  • 입력 2009-05-13 12:41
  • 승인 2009.05.13 12:41
  • 호수 785
  • 5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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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신문물부터 WBC까지 한 자리에…
“한용단(漢勇團)이 유명했던 것은 야구를 잘한다고만 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쌓이고 쌓였던 일인(日人)에 대한 원한과 울분을 한때나마 야구경기를 통해 발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공연하게 일인과 맞붙어 싸울 수 있고 마음놓고 이것을 응원할 수 있는 기회란 이것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 신태범(1912-2001) ‘인천한세기’ 중에서

개항기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에 도입된 수많은 서구문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야구다. 지난 100여 년 간 인천 사람들에게 있어 야구는 단순한 운동경기 이상의 의미였다. 야구경기를 통해 일제 강점기 억눌렸던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고 까까머리 동기생의 어깨를 걸고 사랑하는 모교의 교가를 목청껏 외쳐 부르던 추억. 퇴근길 캔맥주와 통닭 한 마리에 연안부두를 흥얼거리며 쌓였던 하루의 스트레스를 그라운드에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인천 사람들에게 야구는 삶의 애환을 함께 해 온 오랜 친구와 같은 존재였다. 시립인천박물관 기획전시관에 마련된 ‘베쓰볼 인천’ 박람회에는 2회 연속 한국시리즈를 재패한 SK 와이번스의 연고지이자 ‘공포의 외인구단’ 삼미 슈퍼스타즈의 추억이 살아있는 인천의 야구 100년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야구는 개항장 인천에 거주했던 선교사, 무역상인, 외교관들을 통해 도입됐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글러브를 끼고 캐치볼을 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신기한 광경이었다. 야구의 도입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인천 영어야학회(1895~1904) 학생이었던 후지야마 가쯔요시의 1899년 2월 3일자 일기에서 나타난다.


최초의 팀 한용단…야구, 인천을 만나다

일기에서 후지야마는 “지금의 신흥초등학교 앞 광장에서 학우들과 함께 베이스볼이란 서양 공치기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단인 한용단은 일제강점기 항일학생운동의 주축이 됐던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 창단됐다. 한용단은 1919년 웃터골에 공설운동장이 만들어지면서 조직됐으며 인천에서 활약하던 일본인 야구팀들과 경기를 가졌다.

일본인들에게 억압받고 있던 인천 사람들은 일본팀에 맞서 싸우는 한용단을 응원하면서 마음 놓고 조선을 외칠 수 있었다. 1922년과 1924년 일본인 심판의 편파 판정 시비에서 비롯된 소요사건이 발생해 해체 위기에 놓였던 한용단은 이후 ‘고려야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1930년대 초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한용단 해체 후 1930년대 인천 야구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팀은 인천공립상업학교(지금의 인천고) 야구부였다.


고시엔 휘어잡은 인천고, 숙명의 라이벌 동산고

1934년 조선신궁경기대회에 참가해 우승했으며 1936년에는 일본 고교야구 제전인 고시엔 대회 본선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해방 후 사회인 야구의 부흥과 함께 학원야구도 본격적으로 재개됐다. 일제강점기 야구명문이던 인천상업(지금의 인천고)은 해방을 맞아 야구부를 재 창단했고, 동산중학(지금의 동산고)도 야구부를 창단했다.

이후 두 팀은 명실상부한 인천 학원야구의 맞수로 지금까지도 자웅을 겨뤄오고 있다.

인천고 야구부는 1952년 전국체육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1953년 화랑대기, 청룡기 대회를 차례로 제패하면서 전국 최강으로 군림했다. 동산고 야구부는 1955년 인천고의 청룡기 3연패를 저지하며 우승기를 품에 안은 뒤 1957년까지 전무후무한 청룡기 3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1950년대 인천고와 동산고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최고의 성적을 거두자 인천 야구는 학원야구를 통해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1962년 창단한 동인천고도 상당한 실력을 발휘했으며 1982년 뒤늦게 창단한 제물포고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러한 고교야구의 우수한 성과는 그 뒤를 받쳐주는 초등학교, 중학교 야구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2년 전국 주요도시에 연고를 둔 6개 프로야구단이 창단되면서 한국야구도 프로시대의 막을 열게 됐다. 1981년 11월 프로야구 출범을 준비하면서 인천을 제외한 5개 지역의 구단 선정이 완료됐지만 인천을 연고로 하는 구단을 맡아줄 기업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준비위원회에서는 11월 25일까지 인천 구단을 맡을 기업이 나타나지 않으면 연고가 정해진 5개 구단만으로 프로야구를 출범시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때 철강, 목재, 해운 등을 운영하던 삼미그룹이 인천을 연고로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기로 해 인천 최초의 프로야구단 삼미 슈퍼스타즈가 등장하게 됐다.


‘공포의 외인구단’ 삼미 슈퍼스타즈

1982년 2월 삼미 슈퍼스타즈는 인천상공회의소에서 창단식을 가졌지만 운동장 사정으로 인해 상반기 경기를 춘천에서 치러야 했다. 이후 부진한 성적을 이유로 개막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박현식 초대감독이 퇴진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해 7월 17일 공사를 마친 도원구장에서 최초의 홈경기를 치른 삼미 슈퍼스타즈는 11연패를 기록하는 등 순탄치 않은 창단 첫해를 보냈다. 1983년 김진영 감독을 선임하고 재일동포 투수 장명부를 영입하면서 분위기를 쇄신한 삼미는 전기리그를 2위로 마쳐 전년도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선보여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그러나 다음해부터 다시 성적이 추락하면서 1985년에는 18연패라는 최다연패기록을 세우는 등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엎친데 덮쳐 모기업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자 1985년 5월 1일 청보그룹에 매각되고 말았다. 인천 최초의 프로구단 삼미 슈퍼스타즈는 120승 211패 4무의 성적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인천에 뛰어든 조랑말과 돌고래

이후 인천 야구의 명맥은 조랑말과 돌고래가 차례로 이었다. 방직산업이 주력 업종이던 청보는 북미산 야생마인 ‘핀토스’란 이름과 “프로야구에 새바람을”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1985년 후기리그부터 프로야구에 참여했다. 청보는 한때 2위까지 오르며 새바람을 일으키는 듯했지만 결국 4위로 후기리그를 마쳤다.

1986년 야구해설위원이던 허구연을 사령탑으로 임명한 청보. 허구연은 당시 야구계 선배들을 코치로 두며 대대적인 팀 개편작업을 벌이며 의욕적으로 시즌을 맞이했지만 부진한 성적의 책임을 지고 결국 한 시즌 만에 감독직에서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모기업의 경영난을 이유로 태평양 그룹에 매각되면서 두 번째 프로야구단 청보 핀토스도 야구장에서 쓸쓸히 퇴장하고 말았다.

1987년 10월 구단을 넘겨받은 태평양화학은 창업주 서성환 회장이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이라는 점을 내세워 1984년 이북5도를 대표하는 제7구단 창단을 희망했다. 이런 점은 실향민이 많은 인천의 지역정서와 잘 어울리며 새바람을 일으키리라는 기대를 모았다.

태평양 돌핀스는 1989년 김성근 감독이 취임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도 했고 1994년 인천팀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등 인천 야구팬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줬다. 그러나 태평양 돌핀스도 모기업의 재정악화를 이유로 1995년 8월 현대그룹에 인수되면서 앞선 두 팀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됐다.


‘배신의 아이콘’ 현대, 승천하는 비룡 SK

현대그룹은 프로야구 원년에 인천을 연고로 한 팀 창단 제안을 제일 먼저 받았지만 거절했다. 이후 야구단을 가진 기업들이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리는 것을 보고는 프로야구 진출을 결심했다. 1994년 11월 현대 피닉스를 창단한 현대는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해 프로팀들과 선수 스카우트 파동을 일으키며 신인들의 몸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는 등 기존 야구계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며 제2의 프로야구리그를 꿈꾸기도 했다. 결국 태평양과 인수협상에 선 현대는 1995년 9월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게 됐다. 1996년 3월 11일 팀을 창단하면서 팀명은 응모를 통해 유니콘스로 정했다.

인천을 연고로 4년간 활동한 현대는 창단 첫해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하고 1998년에는 인천 연고구단으로는 최초로 한국시리즈를 제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수많은 인천팬들을 뒤로하고 연고지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팬들로부터 ‘배신의 아이콘’이란 비난을 사게 됐다.

1999년 프로야구 제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가 모기업의 경영난으로 해체 상황에 놓이면서 8개 구단으로 유지돼온 한국프로야구는 7개 구단으로 줄어들 위기에 처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SK의 참여를 이끌어냈고 2000년 3월 15일 SK의 연고지를 인천으로 확정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인천팀 SK 와이번스는 다섯 번째 인천 구단으로 경기장에 설 수 있게 됐다.

2007년 팬들과 함께하는 ‘스포테인먼트’ 야구를 표방하며 인천 야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SK 와이번스. 2007, 2008년 인천 연고구단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2연패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하며 명실 공히 프로 최강의 팀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설명 : 동산고 영구보존 ‘청룡기’(사진 위에서 두번째). 1946 년 대회 주관사인 자유신문사에서 처음 제작한 대회 우승 깃발로 운보 김기창의 그림에 수를 놓고 글씨는 성제 김태석이 썼다. 흰색 실크천에 청룡을 수놓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깃발 우측으로 1회 대회 우승팀이었던 부산공립상업중학교에서 학교명을 펜으로 써 놓은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1955~57년까지 대회 3연패를 달성한 인천 동산고에서 영구보존하고 있는데 이 대회 3연패 팀은 지금까지 동산고가 유일하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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