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판 데스노트’에 남병주 vs 최창식 씨름협회 ‘이전투구’
수년 째 지루하게 이어져 왔던 대한씨름협회(회장 최창식·남병주)의 내홍이 경찰의 전격 압수수색으로 절정에 치닫게 됐다. 경찰은 대한씨름협회 핵심 간부들이 대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공금을 횡령한 의혹을 잡고 수사 중이다. 지난해 12월부터 내사에 착수한 경찰은 사건의 첩보를 ‘제3의 인물로부터 전달 받은 투서’를 통해 입수했다고 밝혔다. 수사팀이 투서를 전달한 인물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는 가운데 문제의 첩보가 최창식 회장과 남병주 회장의 알력다툼 과정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이 제기돼 논란이 일 전망이다. 협회장 선거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최 회장과 남 회장은 결국 지난 16일과 17일 따로 총회를 열었고 두 사람 모두 협회장으로 취임했다. 하나의 협회에 2명의 협회장이 탄생한 것이다. 상급기관인 대한체육회가 남 회장의 손을 들어준 가운데 ‘두개의 태양’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지루한 법정싸움까지 예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남 회장 측이 ‘속전속결’을 위해 이번 경찰 수사를 촉발시켰다는 주장이 속속 제기되면서 씨름협회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돌고 있다. ‘모래판 데스노트’로 불리는 투서의 전모와 대한씨름협회를 둘러싼 갈등 막후를 집중 추적했다.경찰은 지난달 21일 대한씨름협회 핵심 간부들이 대회를 운영하면서 거액의 공금을 횡령한 의혹을 잡고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이 같은 혐의에 대해 지난해 12월 첩보를 입수한 뒤 은밀히 내사를 벌여온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지난 20일 송파구 오륜동 협회 압수수색에 앞서 2개월 전 씨름협회 통장 계좌를 수색해 검토한 결과 수천만원의 자금이 여러 차례에 걸쳐 비정상적인 곳으로 빠져나간 정황을 포착했다. 경찰은 압수수색 하루 만인 지난달 21일 사무국 관계자 2명을 소환해 조사를 벌였다.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에 거액 뇌물?
경찰은 협회 핵심 간부가 빼돌린 거액의 공금이 개인 용도와 로비 자금 등 부적절한 용도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고 수사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경찰은 소환한 협회 관계자를 상대로 계좌에서 빠져나간 돈의 명목과 사용처 등을 추궁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씨름협회 사무실을 압수수색해 회계장부와 2007∼2008년 협회가 주최한 대회 관련 서류 등을 확보했다. 경찰은 씨름협회 간부들이 대회를 유치하면서 받은 스폰서 비용과 지방자치단체에서 넘어온 유치지원금, 광고비 등 수익금 가운데 일부를 횡령한 혐의를 잡은 것으로 전해졌다.
수사팀은 협회 핵심 간부들이 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을 수도 있지만 대회를 유치했던 자치단체장 등 관계 공무원들에게 뇌물 성격으로 건네졌을 가능성도 배제하고 않고 있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돈이 공무원에게 건너간 것이 사실로 드러날 이번 사건은 체육계 전체를 뒤흔들 뇌물 게이트로 번질 전망이다.
경찰 관계자는 “씨름협회가 민속씨름대회를 개최하면서 운영자금을 부적절하게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한 것”이라며 “아직 의혹이 구체적인 혐의로 드러난 것은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의혹의 투서, 남 회장 측 작품”
협회 압수수색이 전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형사 사건으로 비화된 이번 파문은 남 회장 측에서 전임자인 최창식 회장이 재임하던 시절 협회 운영에 비리가 있다고 제보해 수사가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상당기간 신임 회장 선출을 놓고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워왔던 사이다. 일각에서는 남 회장이 최 회장을 제거하기 위한 ‘마지막 카드’로 경찰 수사를 의뢰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불거지고 있다. 이에 대해 최 회장 측은 관련 비리의혹에 대해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2006년 이후 수면위로 불거진 대한씨름협회의 내분은 최근 협회장 자리를 놓고 남 회장과 최 회장이 팽팽히 맞서며 볼썽사나운 패싸움을 벌이는 지경까지 왔다. 급기야 2개의 총회가 열려 2명의 협회장이 선출되는 촌극까지 벌어진 게 불과 며칠 전이다.
지난달 17일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대한씨름협회 임시대의원 총회에서 남병주 대학씨름연맹 회장이 협회장에 단독 출마했다. 참석한 대의원 10명은 만장일치로 남 회장을 38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날 총회는 대한체육회가 승인한 총회로 절차상 하자는 없다.
신임 회장 선출을 위한 대의원 총회가 처음 열린 건 지난 1월 23일. 37대 회장인 최창식 전 회장과 남 회장 등이 후보로 출마했다. 최 전 회장은 회장 출마 관련 협회 조항을 들어 “남 회장은 후보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최 회장은 단독 출마해 38대 회장으로 투표 없이 당선됐다. 하지만 대한체육회는 2월 남 회장이 후보 자격이 있다고 판단해 총회를 다시 열어 회장을 뽑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복잡해졌다.
최 회장 측은 이에 반발해 1월 총회 결과를 인정받기 위한 ‘지위 존재 확인 소송’을 법원에 제기한 상태다. 논란 끝에 지난 3월 24일 가까스로 임시 총회가 열렸지만 또다시 욕설과 몸싸움이 난무하며 결론을 내지 못했다.
마침내 최 회장을 지지하는 대의원 11명은 남 회장이 선출되기 하루 전인 지난달 16일 용인실내체육관에서 최 전 회장을 신임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대한체육회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최 전 회장 측은 남 회장이 당선된 총회에 대해서도 무효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스타 돌아왔는데…” 씨름협회 고루한 ‘적통 싸움’
이종격투기로 외도했던 ‘황태자’ 이태현(구미시청)과 ‘들소’ 김경수(시흥시체육회)가 지난해 모래판으로 돌아왔다. 모래판의 특급스타와 기존 장사들의 신구 대결로 볼거리가 풍성해진 씨름. 여기에 KBS가 주관 방송사로 나서면서 쇠락 일변도를 걷던 씨름계에 잠시 희망의 불씨가 지펴진 듯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밥그릇 싸움에 비리 의혹까지 불거진 협회의 작태는 한심함을 넘어 서글프기까지 하다.
최 회장은 지난 17일 서울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남 회장의 선출이 무효하다”고 주장했다. 협회 정관 10조 2항에 따르면 남 회장은 총회 1년 전에 당연직 대의원인 대학씨름연맹 회장에서 사퇴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 후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또 이미 지난 1월 23일 총회에서 본인이 회장으로 선출됐다고도 주장했다. 당시 최 회장은 남 회장 등 다른 후보들이 위와 같은 결격 사유로 자격이 없다면서 무투표 당선을 선언한 바 있다. 최 회장은 “체육회 측이 남 회장과 짜고 총회 승인을 인정했다”고도 주장했다.
협회 내 갈등을 봉합하고 해결해야할 체육회의 입장도 곤란하긴 마찬가지. 일단 남 회장의 손을 들어준 체육회는 “최 회장의 태도가 법과 절차를 무시한 것”이라며 태도를 분명히 한 바 있다. 하지만 최 회장이 관련 사항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뒤 체육회는 사태에서 한 발짝 물러선 상태다.
더욱 답답한 것은 소송이 제기된 만큼 체육회의 판결이 뒤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법적 결과에 따라 회장이 교체될 가능성이 남은 것이다. 당장 사무국 인수인계 과정에서도 진통이 일고 있는 점에서 씨름협회와 민속씨름의 앞날은 짙은 안개 속을 걷고 있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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