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것 한가지는 해결됐지만. 그냥 답답하고, 어렵고….”
국내 유일의 남자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 지인진(34)이 답답한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31승3패1무의 화려한 전적을 자랑하며 WBC(세계복싱평의회) 페더급 왕좌에 올라있는 지인진은 부상으로 인해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챔프 타이틀 박탈위기설’ ‘은퇴후 K-1 진출설’ 등 각종 구설에 올랐다. 일단 지인진은 WBC측에 부상 진단서를 제출하며 방어전 일정을 연기, 타이틀 박탈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격투기 K-1 진출 여부는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지인진은 인터뷰를 통해 “부상으로 재활과 운동을 병행하고 있다”면서 근황을 전한 뒤 “(격투기 진출과 관련해)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는 K-1 진출 루머를 일축했다.
하마터면 타이틀을 ‘반납’할 뻔했다. 작년 12월17일 로돌포 로페즈(24·멕시코)를 꺾고, 11개월만에 챔피언 벨트를 되찾은 지인진은 ‘6개월 이내 첫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는 타이틀 획득 당시 규정에 의해 오스카 라리오스(31·멕시코)와 1차 방어전을 오는 5월26일 치를 예정이었으나 오른손 둘째 손가락 뼈가 밀리는 부상으로 링에 오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챔피언이 특별한 사유없이 방어전을 치르지 않을 경우, 타이틀을 반납하거나 박탈한다’는 규정에 의해 챔프 자격 박탈 위기에 놓인 지인진은 한국권투위원회(KBC)를 통해 자신의 부상 진단서를 WBC측에 송부했고, 이를 WBC가 승인함으로써 타이틀 반납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됐다. 그러나 지인진의 현재 몸 상태는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문제가 된 뼈조각을 잘라냈지만 부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어 지속적인 치료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인진이 진짜 속이 상한 이유는 따로 있다. 타이틀 박탈을 운운했던 언론 보도 탓이다. 언론이 일방적인 프로모션(PS)측 의견만을 담았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확인 전화 한통없이 ‘부상으로 방어전을 치르지 못해 WBC에서 챔프 자격을 박탈하려 한다’는 프로모션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해 기사화했다는 것이다.
지인진은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면 그것은 박탈이 아닌, 자진 반납 형태로 이뤄졌을 것”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진단서를 일찌감치 제출했다면 논란없이 끝날 수도 있었지만 지인진 본인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다보니 쓸데없는 오해가 생겼고, 원하지 않는 형태의 보도가 이뤄졌다.
복싱에 환멸
지인진은 자신의 입으로 직접 ‘은퇴’나 ‘K-1 진출’ 등에 대해 밝히지는 않았지만 몇몇 정황을 살펴본다면 그가 복싱에 환멸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진단서 제출’ 문제. 선수가 좀 더 서둘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부상 진단서 제출’을 본인이 차일피일 미뤘고, 프로모션이 ‘챔피언 타이틀 박탈’을 운운한 뒤에야 서류를 준비했다는 것만 봐도 지인진의 현 심정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지인진의 한 측근은 “지 선수가 요즘 무척 괴로워했다.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챔피언이 된 지금까지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면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이 지 선수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입혔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또 “복싱을 계속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놓였던 것은 사실”이라며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이제는 붙잡거나 말릴 수 없다”고 현재 상황을 정리했다.
불행하게도 지인진은 매니저 및 프로모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 양측과 돈 문제로 첨예한 대립을 이어가고 있다. 지인진의 형편은 넉넉지 않다. 작년에는 12월이 돼서야 타이틀 매치로 대전료를 고작 1만 달러만을 받았다.
지인진이 챔피언에 등극한 지금에도 변한 것은 거의 없다. 프로모션은 이번에도 대전료를 크게 올려주지 않았다. 라리오스와 베네수엘라 국적 호르헤 리나레스(22)간 잠정 챔피언 결정전 승자와 방어전을 가질 지인진에게 제시된 대전료는 고작 4만달러다. 세계 챔피언의 정당한 ‘파이트 머니’라는 것을 감안할 때 어이없는 처사다. 지인진은 15만달러 이상을 약속하지 않으면 보이콧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던지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매니저와의 불편한 관계도 지인진의 격투기 진출설에 힘을 실어준다. 한국 복싱의 대모격인 심영자 회장에 발탁돼 88프로모션에 속해있던 지인진은 90년대 중반, 현재 매니저인 김모 관장(D 체육관)의 제의를 받고 매니지먼트를 옮기게 된다.
문제는 이때 김 관장이 심 회장과 88프로모션에 이적료 형태로 지불한 500만원을 최근까지 지인진이 갚아왔다(?)는 점. 이자까지 합쳐 원금의 두배 가까운 금액이었다고 했다. 아직 지인진은 K-1 진출을 확정짓지 않았다. 격투기 프로모션과 개인적으로 접촉은 했고, 원하는 조건을 약속한다는 답변도 받았으나 복싱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은 쉽게 버릴 수 없다. 얼마전 지인진과 만났다는 그의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프로모션 및 매니저와의 갈등, 형편없는 대접과 생활고가 세계 챔피언을 죽이고 있다. 복싱계가 깨닫고 개혁할 필요가 있다. 결정된 것은 없다. 신중하라고 했다.”
과연 지인진은 어떤 선택을 내릴까. 복싱 챔프가 K-1으로 당장 진출해도 반대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남장현 yoshike3@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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