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대만과 듀스경기나 풀세트 접전 자주 벌어져 위기의식 느껴”
“리베로 제도 세계무대서 한국 발목 잡아, 단결과 화합이 가장 중요”
“살얼음판이죠. 이젠 아시아에서 위상을 지키기도 어려워요.” ‘지장’으로 정평난 이정철 여자배구대표팀 감독(47)의 푸념이다. 정말 그랬다. 76 몬트리올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하며 아시아 강국으로 꼽히던 한국 여자배구는 이제 중국 일본 등 전통의 강호는 물론, 추격의 발걸음을 바삐 재촉하는 대만 태국 등 동남아 국가들의 눈치를 보는 신세로 전락했다. 5위에 그쳐 사상 첫 노메달 수모를 겪은 작년 12월 도하 아시안게임이 결정타였다.
무리한 세대교체로 위기관리 능력에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게 여러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그러나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 감독은 부상자가 여전히 많아도 무리없이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고, 다시 일어나겠다는 선수들의 의욕도 최고조에 도달했다고 설명한다. 본지는 한국 여자배구의 비전과 마스터플랜을 이정철 감독으로부터 직접 듣기 위해 지난 8월1일 오후 서울 송파구 둔촌동 배구협회 사무국을 방문했다.
◆ 아시아 3강 진입 이상무
근래 여자배구는 부상 병동이란 표현이 지나치지 않다. 주력 여럿이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며 이정철 감독을 비롯한 대표팀 관계자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오는 9월5일부터 태국에서 열리는 제14회 아시아 여자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태릉 선수촌에 소집된 최종 엔트리 12명중 핵심 3인방이 아직도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하고 있다. GS칼텍스의 세터 이숙자는 오른쪽 허벅지와 어깨에 통증을 호소하고 있고, 같은팀 소속 센터 정대영은 허리와 오른 발목이 아프다.
현대건설의 레프트 한유미는 조금만 무리해도 무릎에 물이 차 고생한다. 이 감독은 “예비엔트리에 오른 김연경과 황연주(이상 흥국생명)가 일찌감치 부상으로 제외된데다 이들 3명마저 몸이 좋지 못해 아시아 선수권을 준비하기가 무척 어렵다”면서 “전민정 등 몇몇 선수들의 포지션을 이동시켜 부상자들의 공백을 메우려 하지만 쉽지 않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당면 목표로 08 베이징올림픽 출전권 확보를 노리는 한국이 이번 아시아 선수권에서 기대하는 성적은 최소 5위. 일단 5위에는 포함돼야 내년 5월 열릴 예선 최종전에 승부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이미 올림픽 본선행을 예약한 중국과 일본을 제외해도 태국 대만 등 만만찮은 동남아 호적수들이 포진한 탓이다. 한국이 97년 불어닥친 IMF로 팀 수가 기존 10개에서 절반으로 줄어들고, 팀당 인원이 20여명에서 12여명으로 줄어드는 등 정신없이 추락하는 동안, 동남아는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 실력을 향상시켜왔다.
“솔직히 태국 대만은 적수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05년을 기점으로 듀스 경기나 풀세트 접전이 자주 벌어져 위기의식을 느꼈는데 급기야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됐네요.”
하지만 이 감독은 자신의 선수들을 믿는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과 중국을 일찌감치 만나게 돼 속 편히 8강 라운드 이후를 준비할 수도 있다. 방심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3위에는 오를 수 있단 생각이다. “현실상 3위가 가장 이상적이죠. 물론 그 이상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불가능하진 않아요.”
◆ 한국의 발목 잡았던 리베로 제도
이정철 감독은 국제 무대에서 시행중인 ‘리베로 제도(고정 수비수)’에 대해 불만이 많다. 지난 96 세계 그랑프리 대회를 통해 첫 선을 보인 리베로 시스템은 디펜스 강화의 측면도 있지만 종전에 비해 랠리가 길어져 팬들에게 보다 풍성한 재미와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 감독은 리베로가 도입된 초창기만 해도 한국 일본 중국 등 전통적으로 수비는 강하지만 서구에 비해 신장이 상대적으로 작은 아시아 국가들이 수비를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이뤘으나 2000년대부터 서구에서도 디펜스를 강조, 체격좋은 수비수가 탄생해 오히려 더 껄끄럽게 됐다고 한숨을 내쉰다.
“FIVB(국제배구연맹)는 재미를 위해 룰을 자주 바꿨습니다. 발로 차는 ‘킥’ 플레이도 가능하니 전신 운동이 된 셈이지요. 리베로도 여기서 시작됐고요. 예전부터 우리가 공수에 능한 편이라 유리했는데, 수비가 가능한 선수가 1~2명에 불과했던 서구팀이 디펜스를 강화하는 상황이 돼버려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물론 이 감독이 리베로 시스템이 무조건 한국 배구에 나쁜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 수비수가 육성되며 신장이 작은 선수들이 자신도 팀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는 것.
“많은 어린 선수들이 작아도 배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 선수 운용의 폭이 넓어지니 이 점은 매우 긍정적이라 할 수 있어요.”
이 감독은 리베로 시스템과 함께 여자배구의 발목을 잡고 있는 부분으로 기본기 부족을 꼽았다. 성인이 돼 움직임과 동작을 바꾸다보면 외려 역효과만 가져온다는 견해다. “대표팀에서 기본기를 다시 쌓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지적하고 충고만 할 뿐이죠. 서브와 리시브, 토스 등 기본도 못갖춘 선수가 수두룩합니다.”
외국과 국내의 철저히 다른 유소년 배구문화도 여기에 한몫했다. 해외는 철저히 클럽 시스템으로 운영되나 우리 청소년 배구는 성적 위주다. 기본도 익히지 못한 채 수많은 대회를 소화하려하니 몇배로 힘들 수 밖에 없다.
“배구하는 게 재밌어야 해요. 그래야 모자란 시간을 쪼개 개인 발전을 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클럽 시스템이 아무리 ‘흥미위주’더라도 외국 선수가 우리처럼 지겨워서 운동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어요.”
◆ 단결과 화합이 중요
이정철 감독이 대표팀 선수들을 지도하며 항상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선수들 전체의 화합과 일치단결이다. 코트에서 인플레이하는 선수들이나 벤치에 머물며 경기를 지켜보는 후보 선수들이나 모두 같은 목표와 꿈, 비전을 꿈꿔야 한다고 여긴다. 바로 일심동체 화합의 모습이다.
“화합을 이뤄야죠. 배구는 단체 종목이에요. 경쟁심과 투쟁심을 없애란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보다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분열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요.” 이러한 점에서 이 감독은 여자 선수들을 가르치는 게 남자 선수들보다 어렵다는 솔직한 견해를 밝혔다. 특별히 여자 선수들이 못하거나 개인주의가 만연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보다 세심하고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들이 운동 선수 이전에 여성이기 때문에 작은 말실수에도 쉬이 상처를 입고, 조금만 무관심해도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한다’고 오해한다며 이 감독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흥국생명 시절부터 거의 내내 여자 선수들을 지도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선수들은 감정과 감성이 풍부해요. 적극적인 듯 하면서 내성적이고, 소심한 척 하며 말괄량이고….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아요. 훈련때는 욕설이 섞여도 잠잠하지만 일단 그 외 시간에는 철저하게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도 무뚝뚝한 남자 선수들에게선 결코 느낄 수 없는 재미죠.“
분위기에 따라 부침을 많이 타는 여자 선수들의 특성을 잘 꿰고 있는 이 감독은 힘든 훈련도 되도록 즐겁게 하려고 노력한다. 오전 6시부터 7시까지 한시간 가량 진행되는 새벽훈련에 에어로빅과 스트레칭 시간을 포함시킨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한편 이 감독은 여자 대표팀에 대한 협회의 지원에는 충분히 만족하다고 했다. 아시안게임에서 워낙 부진했던 터라 협회가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쏟게된 것 같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인다.
선수들과 함께 트레이너가 상주하고, 주 2~3회 스포츠 마사지사와 물리치료사가 방문해 선수들의 누적된 피로를 풀어준다. 그러나 모든 일에 만족할 수는 없는 법. 한참을 망설이던 이 감독은 여자 선수들을 지도해오며 그간 자신이 희망하고 있는 바람을 드러낸다.
“신생팀이 창단됐으면 좋겠어요. 남자부가 더 시급하긴 해도 여자부에 고작 5개팀이 운영된다는 사실은 정말 창피합니다. 일본은 1, 2부 리그에 9~10개팀이 존재합니다. 승격-강등 제도까지 있다면 설명이 필요없죠. 올해 신인 선수들이 유독 우수하다는데 글쎄, 좋은 소식이 안들리네요. 팀이 많아져야 선수들의 진로가 넓어지고, 배구가 발전하는데. 이 점이 가장 아쉬워요.”
※ 이정철 감독 프로필
▲ 출신교 : 성균관대
▲ 선수경력 : 금성사(현 LIG전신)
▲ 프로 지도경력 : 호남정유 코치(1994~1997), 현대건설 코치(1999~2001), 흥국생명 감독(2001~2003)
▲ 대표 지도경력 :
- 98방콕아시안게임 대표팀 코치
- 2005 세계선수권 대표팀 코치
남장현 ypshike3@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