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53 회
김영수 장편소설 제 5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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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09-14 14:01
  • 승인 2011.09.14 14:01
  • 호수 906
  • 4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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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구명시식(救命施食)

삼생(三生)을 못 이룬 처녀와 총각의 한-2

그녀 주위에 서성대는 사신의 그림자가 어른 거렸다. 그녀도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있었다.

“법사님, 부탁이 있습니다. 고통 받지 않고 죽고 싶은데, 이것도 제 욕심인가요?”

죽음을 앞둔 이들은 절박하게 살려달라고 매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27살 밖에 안 되었지만 갈 때를 알고 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차법사는 문득 쥐고 있던 염주를 그녀의 야윈 손에 꼭 쥐어 주었다.

“지금은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나쁜 사람한테 쫓기는 흉몽을 꾸고 있는 것이나 같습니다. 아무런 고통도 없을 거예요. 안심하세요.”
“그런데 저, 법사님! 저는 결혼을 안했거든요. 흔한 미팅 한 번 못 해보았어요. 혹시 인연이 닿는 좋은 사람이 있으면 결혼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세요.”

보름 후 그녀는 아무런 고통 없이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2주 후, 병원을 운영하는 신도의 남동생이 택시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차법사는 그녀를 떠올렸다. 양가 부모에게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을 제안했다. 처음엔 대기업 엘리트 출신과 택시 기사란 직업 때문에 머뭇거림이 있었지만 다행히 양가에서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예식이 시작되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차법사는 부처님의 전언을 두 영가에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주례사인 셈이다.

“영가들이시여, 그렇다 그렇다 하면 만사가 다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하면 만사가 다 허사인 법입니다. 오늘 영가들은 어디에 있으시렵니까? 영가들이여, 부디 깨우치셔서 무상계 묘법의 안락국에 함께 편안히 계시도록 하소서.”

그 순간, 차법사의 귓전을 때리는 맑은 소리가 들렸다.

“법사님, 저희를 위해 축가 하나 불러 주세요.”

신랑 영가가 차법사 귓전에 어찌나 바싹대고 소리를 지르던지 그만 눈이 번쩍 떠졌다. 차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향해 돌아섰다.

“오늘같이 기쁜 날, 신랑신부를 위해 축가를 한 곡 부르겠습니다.”

선원에서, 그것도 근엄하고 장중한 주례를 하다 말고 갑자기 노래를 부르겠다니. 느닷없는 이 말에 사람들이 무척이나 당황했다.
차법사는 목청을 가다듬지도 않은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별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여…….”

차법사는 노래를 부르며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 두 남녀는 무슨 사연이 있기에 죽어서 연을 맺을까.
순간 섬광이 터지며 주위가 하얗게 밝아졌다. 동참자들의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마침내 돌처럼 굳었고, 벽걸이 시계 초침마저도 마침내 멈추었다. 시간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차법사의 눈에 어느 대갓집 기와지붕이 보였다. 때는 1894년 갑오년이었다. 전통복장의 하인들이 마당을 오가고, 수 십 칸 방마다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적외선 투시 카메라처럼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차법사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비디오 테이프를 고속으로 감듯, 여러 장면이 시간 앞으로 내달렸다.
경상도의 권세가인 진사 집에 19살에 과부가 된 막내딸이 있었다. 딸은 첫날밤 합방도 못하고 몸이 온전하지 못했던 신랑이 죽어서 청상과부가 된 것이다. 할 수 없이 소문나지 않게 딸을 친정으로 데려와 뒷방에 숨겼다. 후처로라도 들이려고 물색하던 어느 날 괴청년이 딸의 방에 침입했다. ‘과부 보쌈’을 하기 위해서였다. 괴한의 정체는 그녀를 흠모하던 총각이었다. 그녀가 14살 나던 단오날에 그녀가 그네 뛰는 모습에 반한 총각이 방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녀도 그를 알아보고 내심 반기는 눈치였다.
그러나 비극이 시작되었다. 들어오던 몸종과 그만 마주치게 되고 말았다.

“도, 도둑이야!”

청년은 붙잡혀 멍석말이를 당하고 만다. 쉬쉬하던 딸의 행방이 드러나고 아랫것들에게 능욕 당했다고 분개한 진사는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더욱 가혹하게 매질을 해댔다. 청년은 피곤죽이 되어 하루를 못 넘기고 숨이 끊기고 말았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음 날 진사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막내딸이 대들보에 목을 매고 싸늘히 식어 있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탕, 탕, 탕.”
“따르륵-”

갑자기 선원 안에 콩 볶는 듯 한 총소리가 진동했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6·25 사변의 한 중심부에 와 있었다. 그런데 깊은 산속이었다. 사내는 빨치산 토벌군이었고 여자는 빨치산이었다. 그러나 둘은 군경 토벌대에게 모두 기고 있었다.
여자가 포로로 잡혀 처형되기 직전 사내가 그녀를 구하려 했는데 그만 발각되어 같이 쫓기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다음날 날이 밝자 처참하게 죽은 남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두 남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현생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대기업 회사원인 여자가 이 남자의 택시를 타고 서울에서 여주 신륵사 가는 길을 함께 하며 서로 통성명을 했던 터였다. 초면이었지만 두 사람은 오래된 연인처럼 그렇게 행복하게, 하지만 짧은 드라이브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2주 간격을 두고 각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기구한 사랑은 삼생에 걸쳐 좌절을 거듭한 뒤였다. 다음 생에도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육신 없는 영혼으로나마 부부의 연을 맺어주어야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차법사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온 몸이 찢기듯 아팠다.

“법사님, 괜찮으십니까?”

예불 스님이 다가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습니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요? 꽤 됐지요?”
“아닙니다. 한 5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래요? 그동안 난 백 년을 왕복했는데….”

신부의 어머니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법사님, 사실은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영혼이란 게 있는지 긴가민가했는데 오늘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제 딸이 제일 좋아했던 노래가 바로 그 <사랑이여>였어요.”

묘하게도 생전의 신랑도 이 노래가 애창곡이었다고 했다. 놀란 건 그뿐이 아니었다. 노래 도중에 갑자기 차법사의 음성이 변했다.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가 차례로 나오더니 나중에는 세 사람의 목소리가 함께 울려 나오고, 마지막에는 두 남녀가 멋진 합창으로 마무리했다.
이 광경을 선원 한 쪽에서 유심히 지켜보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다른 동참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차법사의 눈에만 보이는 영가였다. 그녀의 이름은 윤정이었다. 그녀는 구명시식이 있을 때마다 동참하고 있었다. 차법사와 윤정은 서로 바라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사랑의 진실-1

윤정이 구명시식 현장에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994년 그녀가 죽은 직후다. 스물 넷, 정말 아름다운 나이의 그녀 이름은 윤정이었다. 키 170센티의 늘씬한 외모에 대기업 비서로 열심히 살고 있는 그녀.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미모, 학벌, 직업 등 결혼조건에 그 어느 하나도 빠지지 않는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결혼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왜 그렇게 결혼을 서두르시죠?” 무심코 던진 차법사 말에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결혼도 못하고 일찍 죽을 것 같아서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고 말하는 사람 같았다. 차법사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가 스쳤다. 이상하게 그 어둡고 강한 음기가 차법사의 숨통을 조여 왔다. 그녀의 뒤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뿔사.’

차법사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검은 그림자는 저승사자였다. 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꽃다운 젊은 여인이 어째서 가야할까? 그리고 왜 나를 찾아왔을까?’

강한 의문이 드는 순간 폭죽 터지듯 조명탄 같은 하얀 섬광이 터졌다. 어느 새 선원이 사라지고 으리으리한 대궐이 나타났다. 그녀 전생의 염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녀가 거기 서 있었다. 여러 궁녀들 사이에 섞여 있었지만 분명히 그녀였다. 그녀의 전생은 궁인이었다.

‘어쩌다 꽃다운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게 되었을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차원의 문을 나온 차법사였지만 윤정에게 한 마디도 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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