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구명시식

무신론(無神論) 영가의 등장-3
“슬프고 슬프도다/ 어찌하여 슬프던고 / 이 세월이 견고할 줄/ 태산같이 바랐더니/ 백년 광음 못 다 가서/ 백발 되니 슬프도다……”
그런데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만!”
차법사의 호통소리였다. 음악이 멈추고 순간 무거운 침묵이 짓눌렀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지금 술집에서 뒷풀이 하는 자린가! 전쟁으로 요절한 영가들에게 무슨 백발가야!”
차법사 얼굴은 저승사자도 우려할 정도로 무섭게 변해 있었다. 동참자들은 바짝 얼어붙었다.
“나와 가무단조차 이렇게 마음이 안 통하는데 어떻게 영가들과 마음이 통하겠어!”
동참자들은 차법사가 그토록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순식간에 변하는 차법사의 얼굴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가무단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눈치만 살폈다.
“산 사람이 감흥이 없는데, 어떻게 죽은 자가 감흥하겠나! 구명시식이 정해진 예식장단 맞춰서 앵무새처럼 따라하면 되는 건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어. 돌아가신 자기 부모형제가 지금 눈앞에 모셔져 와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할 텐가. 흉내만 내고 왜 혼을 싣지 못하는가! 하물며 비즈니스도 영혼을 담는데, 예술이 영혼을 담지 못하면 뭐하러 이 자리에 있는가. 여긴 언어도단의 입정처야!”
차법사는 영혼들과 하나 되지 못한 가무단을 나무라고 있었다.
“자신 없으면 다 돌아가!”
가무단의 최고령자가 비장하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요청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처음부터 다시 해!
출발선에 선 선수들처럼 긴장감이 팽팽했다. 가무단들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탁’ 하는 고수의 신호를 시작으로 소리꾼이 구슬픈 타령을 풀어놓았다.
“태백준령 이 산 저 산…….”
타령을 마치자 차법사는 조박사를 불렀다.
“이곳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저와 눈길만 마주쳐도, 아니 그냥 마음만 있어도 통합니다. 말없이 와서 말없이 가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져갑니다.”
그랬다. 오히려 불교를 안다고 하는 분들이 손해를 보았다. 의식이 불교식으로 치러지니 그 형식적 예식을 그저 반복했기 때문이다. 복통기운을 느끼던 차법사의 통증도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 천도가 잘 되었다는 증거였다.
이렇게 이날 4가족이 공교롭게도 6·25관련 희생자 후손으로서 한을 풀었다.
전생의 살인자를 찾아서-1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낭랑한 요령소리가 다음 막을 알렸다.
40대 김씨는 영단 앞에 고개를 떨궜다. 영단에 오른 김씨의 형은 정씨 성을 가진 청년에게 돈 5백만 원을 빼앗기고 살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형님은 꽃다운 나이에 가족을 두고 무참히 피살 되었습니다. 사람 목숨이 겨우 500만 원밖에 안되다니요. 형님께서 얼마나 한스러웠겠습니까. 형님을 죽인 살인자는 지옥에 떨어졌겠지요? 불쌍한 저희 형, 극락왕생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어린 남매를 놔두고 생을 마감하다니 참으로 딱한 사정이었다.
이때 영단에서 해쓱한 표정의 영가가 스스륵 걸어 나왔다. 김씨의 형이었다. 김씨 걱정대로 형은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듯 제대로 말문을 열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차법사가 그 주위를 응시했다.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쏜살같이 숨는 게 아니가.
‘뭐지?’
차법사는 잔뜩 긴장했다.
그때였다! 그날 구명시식 동참가족으로 따라온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면서 양팔을 휘두르는 게 아닌가!
“그래 너도 죽어보니 그 맛이 어떠냐. 무슨 낯짝이 있어 이런 자릴 오는 게냐, 이놈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같이 온 가족과 주위 사람들은 혼비백산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얼마나 완강하게 뿌리치고 고함을 치는지 건장한 남자들이 만류해도 막무가내였다.
차법사는 할머니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역시 그랬다. 할머니 안에 웬 사내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다른 영가가 할머니 몸에 덧씌워지는 빙의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누군데 이런 엄정한 자리에 나타나서 횡포를 부리는가!’
차법사의 엄중한 경고에 빙의영가는 한풀 기세가 꺾였다. 동시에 할머니도 조금 진정의 기미를 보였다.
‘나는 저 놈의 저승사자요. 내가 저 놈을 칼로 찔러 죽였지.’
빙의영가는 다름 아닌 가해자였던 바로 그 살인자였다. 그는 목에 굵은 밧줄을 감고 핏발 선 눈으로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
이때 김씨의 형 영가가 고함쳤다.
‘여기까지 니가 왜 따라와! 여긴 내 형제가족이 오는 자리야.’
‘왜, 나도 함께 얻어먹으러 왔는데 뭣이 어떠냐!’
남을 해코지하는 영가는 죽어서 후회하고 죄책감에 머리 조아리는 게 보통인데, 이상하게도 이 영가는 당당했다. 가해자로서의 죄책감이라든가 미안해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내가 저 놈을 죽인 대가로 교수형을 당했고, 그래서 가해자가 되고 말았지. 하지만 그 전전생(前前生)에서는 저 놈이 나를 죽인 가해자였소.’
그랬다. 그의 말대로 그 둘은 벌써 몇 생 째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악연의 사슬에 얽혀있었다.
‘그러니 이놈을 부르는 자리에 내가 못 갈 이유가 없지.’
그의 당당한 주장에 차법사는 기가 막혔다. 과연 누가 죄인일까. 현생에서는 분명 가해자가 사형까지 받아 법적으로 죄인이 분명하지만, 전생에 남을 살해해서 이에 원한을 가진 영가가 결국 세대를 건너뛰어 복수를 한 것이니 가해자와 피해자가 세대를 두고 서로 자리바꿈한 인과응보였던 것이다.
차법사는 두 영가를 불러 서로 얽히고설킨 악연의 고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그들을 위해 법문을 지어 정성껏 위로하며 화해를 권했다.
“서로 주고받았으니 이제는 화해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고함치던 노파가 제 정신을 되찾고 조용해졌다. 언제 그랬느냐 싶게…….
수많은 사람들이 차법사를 찾아 상담을 한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다. 찾는 이들의 대부분은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늘도 무심하다’, ‘세상에는 정의가 없다’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럴 때마다 차법사는 실의에 빠진 이들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희망과 용기로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하지만, 김씨처럼 인과를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자리가 겨우 진정되자 차법사가 불안해하는 김씨를 불렀다.
“법사님 뭐가 잘못 됐나요? 형님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저승에서도 고통을 받으시나요? 혹시 그 살인자가 나타났나요?”
상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형님이 전생에 살인자였기에 형이 전생의 과보를 받아 죽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은 없는 법. 다음 차례인 조씨가 바로 그 예외였다.
회갑이 다 되가는 사업가 조씨는 정성스럽게 싼 보자기를 영단 앞에 놓았다. 두 눈에선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렸다. 그 눈물은 보자기 위에 뚝뚝 떨어져 눈물 꽃을 수놓았다.
매듭을 푸는 조씨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한 자(약 30cm) 남짓한 나무 상자 두 개가 드러났다. 그런데 작은 나무상자는 마치 시신을 담는 관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 축소한 형상 아닌가.
조씨가 조심스럽게 목곽의 뚜껑을 열었다. 각각의 상자 속에는 밤나무로 조각한 목각인형이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조선 말기 중년 남성의 복장을 한 사내와 고운 비단 한복 차림의 여인의 모습한 목각 인형이 있다. 두개의 목각 인형은 시신을 대신해서 밤나무를 깎아 만든 목신(木神)이었다.
밤나무로 목신을 만드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밤[栗]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다른 식물의 씨앗은 본 형태를 잃으면서 새싹이 나오는데 반해 밤은 새싹이 돋아도 밤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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