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22 회
김영수 장편소설 제 22 회
  •  기자
  • 입력 2011-01-31 12:48
  • 승인 2011.01.31 12:48
  • 호수 875
  • 3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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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강증산의 유언

간도 출정식

8월 26일 저녁. 밖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100일 구명시식이 벌어지고 있는 극장에 용화도 동참하고 있었다. 용화는 열세분의 열성조 영정 옆에 붙어 있는 익숙한 그림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건네준 현무경과 증산 유서가 나란히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증산 화천 100년 만에 이렇게 100일기도에 등장한 광경을 보니 마치 증산이 살아온 듯 감개무량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날 놀랄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1시간 넘는 예식이 끝나고 차법사가 무대로 올라갔다. 열성조 영정에 절을 올린 차법사는 아무 말 없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고이 접은 한지였다. 하늘이 내려주는 부적을 쓰는 검붉은 색 견명주사로 쓰인 4글자의 한자가 펼쳐졌다.
그때였다. 별안간 차법사가 손가락을 깨물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장내가 술렁였다. 붉은 선혈이 글씨 위로 빗물처럼 후루룩 떨어졌다. 차법사는 피 위에 인장 찍듯 엄지손가락을 꾹 눌렀다. 차법사는 피로 인장을 찍은 견명주사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펼쳐보였다.

爲法忘軀(위법망구)

“오늘은 출정식이 있는 날입니다. 무슨 출정식이냐 하면……. 간도협약 무효소송 출정식입니다. 도(道)가 석장이면 마(魔)는 열장이라고, 큰 뜻에는 마장이 끼기 때문에 귀신도 속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100일 구명시식 딱 절반이 되는 오늘에야 여러분들에게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좌중은 다시 한 번 술렁였다.
“여기 견명주사로 쓴 글자는 위법망구(爲法忘軀)입니다. 이 법을 위해서는 이 한 몸 바쳐도 좋다는 뜻입니다. 아난존자가 불법을 전하려 떠나려 하자 석가모니가 ‘돌에 맞아 죽을 텐데 괜찮겠는가?’라고 묻자 아난존자는 ‘죽는 줄 알면서도 간다’고 했습니다. 눈이 쌓이는 겨울날 혜가는 달마대사에게 팔을 잘라 바치며 ‘이 한 몸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위법망구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 출정식을 올립니다.”

용화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오늘 한 손님을 초대했습니다.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이 일을 위해 꼭 필요한 분입니다. 박형기씨입니다. 나와서 인사드리세요.”

차법사는 전날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간도협약 100년의 조망’ 학술대회에 다녀온 참이었다.
열흘 뒤 9월 4일이면 간도협약 100년이 되는 날이기에 관련 시민단체들은 들썩였다. 100년이 되기 전에 정부가 나서서 국제사법재판소에 간도협약 무효소송 서류를 접수하라는 시위였다. 관련 시민단체들은 전국 곳곳에서 궐기대회를 열고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이날의 학술대회 역시 현 정부의 행동을 촉구하는 일종의 시위성격이었다.
차법사가 학술대회에 간 이유는 한 가지였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에 간도협약 무효소송 서류를 접수에 같이 갈 동참자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대정부 성토가 이어진 회의는 시종일관 뜨거웠다. 그러나 이상했다. 차법사가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들은 성토만 할 뿐 헤이그에 간다고 나서는 행동가가 없었다. 실망한 차법사가 돌아서려는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박형기 민족운동가였다.

차법사의 갑작스런 거명에 당황한 박씨는 무대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띠리링- 띠리링-

별안간 요란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진지하던 분위기에 일순간 파문이 일었다. 기도 입장 전엔 진동, 묵음조차 금하고 전원을 끄도록 확인을 하고, 그래도 노파심에 식 시작 전 무대 위에서 사회자가 확인 안내방송을 하여 이중삼중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터였다.
누구 벨일까. 부주의를 책하듯, 150여명의 시선이 벨소리 쪽으로 일제히 모아졌다. 다름 아닌 박씨의 휴대전화였다.
박씨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입구에서 안내에 따라 분명히 전원을 끄고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미안한 마음에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파워 버튼을 눌렀으나 도무지 작동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눌러도 무심한 벨은 계속 울려댔다.
차법사는 그런 광경에 빙그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23년간의 구명시식 중에 종종 코드가 빠진 전화기 벨이 울린 적이 있었기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사를 앞둔 지금, 예사롭지 않은 신호였다. 사람들은 무슨 징조일까 궁금해 했지만, 나중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박씨는 동행했던 총무에게 얼른 전화기를 넘겨주며 꺼지지 않는 휴대전화를 극장 밖으로 가져나가게 했다. 무대에 오른 박씨는 송글송글 이마에 맺힌 진땀을 닦으며 동참자들에게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이상하네요. 분명히 들어오면서 껐거든요. 더 이상한 건 파워를 아무리 눌러도 전원이 안 꺼진다는 겁니다.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네요. 아무튼 초면에 거듭 사과드립니다.”

박씨는 간단하게 헤이그에 같이 가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차법사는 후암미래연구소 사무국장인 김국장도 나오게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민족회의라는 임시준비정부의 대표, 부대표로 저를 대신해서 같이 갈 겁니다.”

두 사람의 인사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위법망구 넉자를 드릴 테니 가지고 가세요. 여기 모인 분들의 기도가 함께 가는 겁니다. 이준 열사와 같은 심정으로 우리의 뜻을 전해주세요.”

다시 한 번 박수가 터졌다.
용화는 식 내내 가슴이 벅찼다. 출정식도 출정식이지만 증산 이후 사라진 ‘납향제(臘享祭)’를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납(臘)이란 ‘연종(年終)에 천지신명들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뜻한다. 옛날 중국 하나라 때는 청사(淸祀), 은나라 때는 가평(嘉平), 주나라 때는 석사라 하였고, 한나라 때는 납(臘)이라 했다.
납향제(臘享祭)는 본래 나라 임금이 제주(祭主)가 되어, 나라의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는 행사이다. 국조 단군 이래 반만년 역사 동안 피고 진 나라가 많았는데, 각 건국조(建國祖)들에게 제사 지내는 국가적 중요행사였다. 예로부터 동지 후 제삼 술일(第三戌日)에 납향제를 지내던 것을, 조선국 이태조는 동지 후 제삼 말일(第三未日)로 고쳐서 지냈다.
증산도 납향제에 공을 들였다. 책에는 증산이 무신년(1908년) 동짓달에 무신납월(戊申臘月) 공사를 본 기록이 나온다. 이 납월공사는 천지(天地)를 바로잡는 대공사(大公事)라고 하였고, 이 식을 올리면서 글 쓴 종이가 무수히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부분의 제문과 부적은 그 자리에서 불태워 없어졌고, 현존하는 그림들은 그중의 일부가 현무경이라 불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면면이 이어오던 납향제의 명이 끊긴 때는 일제 강점기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겼으니 그렇다 치고, 해방 후는 어떠한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대통령도 납향제를 지낸 기록이 없었다.
단군 이래 수천 년 동안 지내온 납향제가 우리 손에 절명된 것이다. 용화는 국가지도자들이 현충사에는 참배하면서 납향제를 외면하는 것에 늘 안타까움이 큰 터였다.
그런데 이번에 차법사가 국조 단군을 비롯하여 13명의 열성조님을 위한 구명시식을 올리는 장면을 눈으로 확인하니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한 건 당연했다.
특이한 점은 열성조 위패 옆에 일반인 조상의 위패도 빼곡히 붙여져 있다는 것이었다. 어림잡아도 1천여 개가 넘었다. 이렇게 대대적인 제는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장장 100일간이나 제를 올린다니, 용화는 십년 묵은 체증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용화에게 약간 못마땅한 점이 있었다. 잠시 기다리는 시간 때문이 아니었다. 식이 끝난 후 차법사가 가는 사람들을 문까지 나와 일일이 손을 잡고 배웅을 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식을 집전하는 제사장이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지천태(地天泰)의 등장-1

식이 끝나고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선원 중앙에 10여 명은 앉을 수 있게 넓은 찻상과 방석이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일종의 차 마시는 뒤풀이였다.

“오신 손님들 배웅하는 대로 법사님이 오실 겁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언제 나타났는지 예불스님이 방금 올라온 용화를 친절하게 자리로 안내했다. 용화는 큰 가방 꾸러미를 소중하게 옆에 놓고 도포자락을 정리하며 정갈하게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차법사가 들어왔다.

“아이고,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손님들 보내느라구요.”

차법사는 신도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용화가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 맞인사를 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차법사는 혼자가 아니었다. 뒤이어 용화 또래의 중년의 사내 두명이 따라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 차법사가 소개했다.

“이 분은 오랫동안 증산을 연구하신 용화 선인이십니다. 오늘 중요한 설명을 하기 위해 먼 길을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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