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밸리 제 36회
킬러 밸리 제 36회
  •  기자
  • 입력 2008-11-13 11:47
  • 승인 2008.11.13 11:47
  • 호수 759
  • 5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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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수는 경황 중에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퇘퇘.”

변을수 일병은 입 속에 가득 고인 흙을 내뱉었다. 다행히 심하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요란하게 사격을 하던 M16 소총 소리는 잠잠해진 반면 따르륵 따르륵 하는 AK 자동소총 소리가 어둠 속 정글을 여기저기 휘저으며 다니고 있었다. 이건 바로 7중대가 제압을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겁이 덜컥 났다. 그는 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총소리가 나지 않는 곳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부윽!

갑자기 전투복 등 부분이 쭉 찢어졌다. 살갗이 쓰라리고 축축해졌다. 등 부분이 선인장 가시에 걸리며 상처가 난 모양이다. 그때 갑자기 “타타탕” 하고 요란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바위가 총알을 맞고 파편이 우박처럼 튀어 올랐다. 변을수 일병은 적군에게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었다고 생각을 했다. 을수는 낮게 포복을 한 후 전방을 응시했다.

쏠까? 말까?

그때 임태호 상병의 말이 떠올랐다. 불리한 상황에서는 절대로 먼저 쏘지 마라. 너만 표적이 될 뿐이다.

변 일병은 사격을 단념하고 낮은 포복으로 그곳을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어갔을까?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져 위험지역은 빠져 나온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쯤일까?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쪼다 자식. 살아 있었구나.”

“누구냐?”

“쉿! 이쪽으로 와라, 혼자가?”

목소리는 틀림없는 개미허리였다. 변을수 일병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응시했다. 짙은 어둠속 건너편 바위 밑에 살쾡이처럼 움츠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개미허리였다. 변일수 일병은 자기도 모르게 낮은 포복으로 개미허리에게 다가 갔다. 너무 반가워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개미허리 김 하사를 여기서 만나다니 꿈만 같았다.

평소에 그는 반가운 고참이 아니었다. 위기의 순간에는 자기만 살기 위해 혼자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었다. 서로 엄호하며 전투를 해야 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자기만 살기위해 혼자서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그런 전우는 가장 믿을 수 없었다. 전투는 팀워크다. 그런데도 그를 만난 것이 너무 반가웠다.

변을수 일병은 단걸음에 개미허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개미허리 옆에는 누군가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누고?”

변을수 일병이 개미허리에게 물었다.

“보고도 몰라 임마!”

누워있는 사람은 권영준 병장이었다.

“권 병장, 여길 떠야겠다, 걸을 수 있겠어?”

개미허리가 권영준 병장에게 말했다.

“난 틀렸어, 그냥 두고 떠나.”

“쉿!”

갑자기 개미허리가 재빨리 엎드렸다.

와삭와삭.

캄캄함 어둠 속 정글 저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개미허리가 변을수 일병에게 속삭였다.

“여길 뜨자. 권 병장을 부축해.”

변을수 일병은 권영준 병장을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개미허리의 뒤를 따라 캄캄한 정글 속을 뛰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짙은 밤안개, 칼날 같은 선인장의 가시, 입 속으로 스며드는 땀방울의 짭짭한 맛, 터질 것만 같은 심장의 고동 소리가 공포에 질려 몸부림을 쳤다.

밀림 속에 적들이 추격해 온다. 그들은 우릴 죽일 거야. 정우병 상병처럼 칼로 갈가리 찢어서 죽일 거야. 포로가 되는 것보다는 총에 맞아 죽는 게 훨씬 고통이 덜 할 거다.

뛰어라, 어서!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두려움이 산불처럼 활활 번져 나왔다. 미칠 것 같은 공포로 눈이 확 뒤집어졌다. 짙은 어둠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추격을 해오고 있었다. 총으로 사격하지도 않고,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추격하는 적, 도망칠수록 더 다급하게 쫓아오는 추격자는 바로 죽음의 그림자였다.

“이얍!”

앞서가던 개미허리가 날카로운 기합 소리와 함께 허리에 차고 있던 대검을 뽑아 던졌다. 추격해 오던 검은 그림자가 나무 위에서 떨어졌다.

변을수 일병은 공포에 질려 땅바닥에 떨어진 검은 물체를 노려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원숭이였다. 강아지만한 원숭이의 가슴에는 대검이 박혀 있었다.

개미허리는 원숭이의 가슴에서 대검을 뽑아 정글 복에 쓱쓱 문지른 후에 칼집에 꽂고는 허리에 찬 수통을 찾았다. 4개의 수통 중 겨우 하나가 남아 있었다. 개미허리는 수통을 흔든 어 한 모금을 마시고는 권영준 병장에게 수통을 건네주었다. 물을 마시는 권영준 병장의 목울대가 왠지 서글프게 보였다.

“개밥이 되기 전에 빨리 여길 뜨자.”

개미허리가 다시 앞장을 서며 길을 열었다. 정글 속 깊숙이 들어온 것 같았다. 도대체 여긴 어디쯤 될까? 정글의 바다 속을 헤엄치는 것만 같았다. 그 바다는 끝이 없고 망막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바람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깊은 정글이었다.

“으윽!”

갑자기 권영준 병장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그리고 꾸역꾸역 토하기 시작했다. 힘들기는 변을수 일병도 마찬가지였다.

“김 하사님, 쉬어 갑시다. 이젠 죽어도 더 못 가겠어, 쉬어…”

변을수 일병이 중얼거리며 쓰러졌다. 차라리 이 고통보다는 죽는 게 더 편할 것만 같았다. 개미허리도 땅바닥에 길게 누우며 중얼거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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