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 풍속사 <제28화>
조선 성 풍속사 <제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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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8-16 17:28
  • 승인 2007.08.1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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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녀(妖女)에게서 부(富)를 얻다!

전회(前回)에서 요녀에게 당해 패가망신한 사내의 얘기를 소개했었다. 그런 요상한 계집들에게 당하고도 하늘이 도와 일확천금(一攫千金)의 행운을 얻은 몇몇 사내들의 설화가 있어 소개코자한다.

옛 전라도 속담에 ‘올공금팔자(兀孔金八字)’라는 말이 있는데, 올공금은 전통악기인 장구의 줄을 양쪽 가죽에 거는 갈고리로서 ‘걸겅쇠’라고도 하며 ‘용두쇠’라고도 한다. ‘팔자’는 음양오행설에서 말하는 사주팔자(四柱八字) 즉 운명관을 나타내는 말이다.

옛날 전주(全州)에서 집안 대대로 장사를 주업으로 삼는 부유한 상인집안의 젊은이가 큰 배에 생강을 한 배 가득 싣고 평양으로 장사를 나서고 있었다.

이 젊은 상인의 노(老)부모는 자식의 풍류적인 기질을 잘 알고 있던 터라, 나루터까지 나와 물건을 모두 처분하고는 이내 돌아와야 한다며 몇 번이고 주의를 주며 신신당부했다. 젊은 상인은 이번만큼은 믿으셔도 좋다고 호언하며 부모를 안심시켰다.

출항한 배는 서해 바다를 거쳐 한밤을 보내고서야 대동강 하류에 도착했고, 강줄기를 타고 한 식경쯤 강물을 거슬러 오르니 평양나루터에 정박할 수 있었다.

미리 생강장사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관서지방 곳곳의 상인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기다리고 있던 터라, 배를 정박하기가 무섭게 한 배 가득한 생강을 순식간에 다 처분할 수 있었다.

생강은 남쪽지방에서만 생산되었고 관서지방에서는 나지 않는 물건이라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매우 비쌌다. 한 배 가득한 생강은 1천 필의 삼베와 같았고, 곡식 1천 석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었다.

예상외의 빠른 성과로 들떠버린 젊은 상인은 제 버릇 개 줄까라는 속담처럼 생강을 처분한 많은 돈으로 기방(妓房)에 들게 되었는데, 한 기생의 곱디고운 자태에 반해 그만 그 기생의 집에 눌러 앉게 되었다.

이후 수년 동안 같이 살면서 온갖 음희와 풍류를 즐기며 재물을 모두 기생집에 바쳤다.

상인의 재물이 다 떨어지자 눈웃음치며 탱탱한 둔부를 흔들던 기생은 온데간데 없고, 도끼눈을 뜨고 칼바람을 일으키는 요부가 상인을 냉대하며 내쫓으려 했다.

상인은 모든 재물을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고향사람 알까 부끄럽고, 부모님 뵐 낯도 없고, 기생집을 나서자니 머물 곳도 없어, 기생에게 자신이 갈 곳도 없고 하니 머슴살이라도 좋다 제발 내쫓지만 말아달라고 사정했다. 이에 기생은 머슴도 필요했고 횡재다 싶어 그렇게 하라고 선뜻 승낙했다.

이렇게 해서 상인은 그 기생집의 머슴이 되어 손님들의 말에 먹이를 주는 일과 땔감을 마련하는 일 등등 온갖 잡다하고 힘든 일을 하면서 고통을 감수했다.
기생이 다른 남자와 자신이 기거하던 안방에서 잠자리를 할 때면 상인은 부엌에서 불을 때며 쭈그리고 앉아 밤을 지새웠다.

때때로 방안에서 기생의 자지러지는 신음소리가 들릴 때면 기생의 백옥 같은 살결과 풋풋한 살 냄새가 떠올라 몇 번이고 달려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상인은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리는 육신을 추슬렀다.

상인은 여러 해 동안 맘고생을 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고향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지언정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도 없는 밤이라 상인은 기생의 방에 들어 자신의 생각을 기생에게 알리게 되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소. 그동안 신세 많이 졌구려, 내 그 은혜 잊지 않으리다.” 상인이 덤덤하게 말했다.

“서방님 잘 생각하셨어요. 한때의 정분이 있어 서방님의 청을 못이기는 척 들어드렸지만, 고생하시는 서방님을 뵐 때면 소녀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서방님께옵서 더 잘 아시겠지만 제 집에 여유가 없어 노자(路資)돈은 줄 수 없고… 서방님 기억에 남을만한 마땅한 물건을 드리고 싶은데…” 기생이 상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기생은 집안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벽장에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장구를 꺼내어, 거기에 걸려있는 녹슨 16개의 ‘올공금’을 풀어 주면서 갖고 가다가 쌀과 바꾸어 양식으로 하라고 했다.

상인은 그것을 받아가지고 좋아하면서 길을 떠났다. 강가의 모래밭에 이르러 가져온 올공금 16개를 모래에 문질러 녹을 닦아 보았더니, 검정색이 도드라져 빛을 발하며 윤이 나고 보통 쇠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 보통 쇠와는 전혀 다른 것이 어떤 특별함이 있을거야!’라고 생각하며 상인은 나룻배로 강을 건넜다.

상인은 황강(黃岡) 장날에 올공금을 가져가서 장터에 자리 잡고 앉아 면포 위에 그것을 펼쳐 놓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이 물건은 쉽게 찾을 수 없는 진귀한 보물입니다. 이것을 1백만 냥이면 팝니다”하고 소리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점잖은 선비가 지나가다가 다가와서 유심히 살펴보고는,

“이것 어디에서 났소?” 갸우뚱하며 선비가 물었다.

“장물(贓物)은 아니니, 선비님께서 알건 없소이다.” 상인이 대답했다.

“그 참 희한한 일이네. 이것은 ‘오금(烏金;검정색 금)’이라는 것인데, 보통 금의 10배가 넘는 비싼 값으로 팔리는 보물중의 보물로 매우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라 그랬소이다. 내가 1백만 냥을 내고 사겠소이다.” 선비가 확고히 말했다.

상인은 그 선비와 전주까지 함께 가서 그 돈을 받고 올공금을 모두 팔았다.

곧 상인은 그 돈으로 옛날에 생강을 산 본전을 갚고도 많은 돈이 남아 동방갑부(東方甲富)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상인을 오금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고 하여 ‘오금장자(烏金長者)’라 불렀다 한다. 이러한 얘기가 전해지며 ‘사람의 운수는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올공금팔자’라는 속담이 여기에서 생겨났다고 전한다.

이 설화는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던 어우당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한국최초의 야담집 어우야담(於于野譚)에 수록되었다.

이 야담집은 흔히 민간에 유포된 음담패설이 아닌 풍자적인 설화와 기지 있는 야담들로서 조선 중기 설화문학의 좋은 자료로서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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