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일본서 활약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한국엔 언제 나왔느냐?”손과 손을 맞잡은 김두한 의원과 마찌니, 그들은 둘 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한국에 나온지 2,3일 됐어요. 친구의 초청으로 나왔는데 형님 생각이 나서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지요.”“아, 그랬었군.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이.”그날 밤 김두한 의원은 마찌니와 단둘이 대폿집에 앉아 옛날을 회상하며 술을 마셨다.“그래, 사업은 잘 돼? 도쿄는 워낙 바닥이 크니까 재미 있는 일도 많았겠지?”김두한 의원은 빙긋이 웃으며 마찌니의 심중을 떠보았다.마찌니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 뒷골목의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은 일찌기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극우파와 국수주의 백색테러단을 움직이는 실제의 인물이 마찌니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기 때문에 그 동향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바닥이 너무 넓다보니 힘이 많이 들지요.”이렇게 말하는 마찌니도 빙그레 마주 웃어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김두한과 마주 앉아 대작하고 있는 사람은 이미 옛날의 마찌니가 이니었다. 도쿄의 뒷골목을 호령하는 밤의 황제답게 태도가 의젓하고, 몸 놀림 하나하나에도 빈틈이 없어 보였다.“형님은 요새 「애국단」을 이끌고 계신다지요? 잘 되어가십니까?”“어려워. 예날과는 달라서 지금 내 처지로서는 아이들 활동비조차 대기가 힘든 형편인 걸.”“아 그래요? 그처럼 자금 사정이 안좋으면 어떻게 조직을 운영하십니까?”“그러자니 어거지지. 내 집은 물론 동지들의 집까지 잡혀서 활동자금으로 쓴는 형편이니까. 허허헛……….”김두한 의원은 공허하게 웃었다.“그래서야 어떻게……….”마찌니는 놀라운 표정이었다.“정치활동을 하시려면 돈 줄이 없어서는 안될텐데…. 그런데 형님은 어째서 뒷골목 사업에서 손을 모두 떼셨습니까?”“아주 손을 뗀 것은 이니지. 다만 활동 자금이 없어서 손을 못대고 있을 뿐이지.”마찌니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고개를 몇번인가 조아리더니,“형님의 말 뜻을 알겠습니다만, 만약 자금이 필요하시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별로 힘은 없지만 자금 줄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알려드리지요.”순간 김두한 의원이 눈썹이 꿈틀하고 치솟았다. 뭔가 몹시 불쾌해 하는 낯빛이었다. 그런가 하면 김두한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생각났다.
그러자 아무리 어려워도 일본놈의 자금으로 더구나 「애국단」의 활동자금으로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지하에 계신 아버님이 통곡하실 것만 같았다. 이윽고 김두한 의원은 착 가라앉은 말씨로“그럴 필요 없어. 난 맥주먹으로 일하는 것을 보람으로 느끼니까.”김두한 의원의 이 말에 마찌니는 싸늘하게 미소짓는다. 그런가 했더니,“제가 실수했으면 용서하십시오. 전 다만 형님 처지가 딱한 것 같아서……….”“술맛 달아나게 그런 얘기 집어치우고 술이나 들자구.”김두한 의원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쭈욱 들이켰다.김두한 의원은 마찌니가 무엇 때문에 한국에 나왔는지 그 말투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뒷골목의 생리, 김두한 의원은 누구보다도 그 뒷골목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혁명정부에 의해 한·일 국교가 정상화될 기미를 보이고, 멀지 않은 장래에 민간교역이 이루어질 조짐이 보이자, 그들은 재빨리 한국에 상륙하여 뒷골목 조직과 연결고리를 맺고 검은 손을 뻗쳐보자는 수작이었던 것 같았다.(내가 누구라고 감히!)김두한 의원은 치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눌러 참으며 술만 연거푸 퍼마셨다.“형님, 해방 후에 북한공산당들의 준동이 굉장했다죠?”마찌니는 김두한 의원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화제를 바꾸었다.“굉장했지. 대낮에 시가전을 벌일 정도였으니까.”김두한 의원도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며, 감회가 깊은 듯 실감있게 이야기를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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