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들에게 반공 결사조직 강조
부하들에게 반공 결사조직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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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10-01 09:00
  • 승인 2004.10.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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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형님을 따르겠소!”거기 모였던 참모들과 부하들이 모두 소리높이 외쳐대었다.김두한은 이제 곧 닥칠 총선거에 대비하여 ‘성남장 호텔’에 선거본부를 차리고 조직을 점검하기 시작했다.그런데 문제가 간단치 않았다. 4·19의거 이후의 과열된 분위기와 이승만 독재정권과 싸운 민주당의 인기 때문에 종로에서 출마한다는 것은 도저히 승산 없는 싸움인 것 같았다.“형님, 그러지 마시고 이번 기회에 부친의 고향인 홍성에서 출마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형님의 인기는 서울이나 시골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김영태가 김두한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이렇게 의견을 내놓았다.“내 아버님의 고향인 홍성이라? 그거 좋은 생각이군.”이렇게 하여 김두한 의원은 그 자리에서 종로가 아닌 홍성에서 출마하기로 정했다.

그러나 홍성에서 출마한 김두한은 백야 김좌진 장군의 막강한 후광에도 불구하고 외롭게 고군분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김두한은 이 때나 저 때나 항상 외톨이요 혼자였다. 그의 지지자요 마음의 지주였던 조병옥 박사가 가버린 지금에는 더욱 외롭고, 고독한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친애하는 홍성 군민 여러분! 나, 김두한은….”막강한 세 후보의 3파전이 붙은 홍성에서 인기면에서야 그 누구보다도 김두한이 제일이었으나, 돈과 조직면에서 열세인 그는 고전에 고전을 거듭했다. 김두한이 돈이 없어 고전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옛 부하들은 부인의 패물과 집문서까지 잡혀서 자금 조달을 해주었다.“형님, 몇 푼 안되는 돈이지만 보태쓰십시오.”“단장님, 제것도 성의로 아시고….”김두한은 이러한 돈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핑 돌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눈물나는 우정이요 동지가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오냐, 내 꼭 성공하여 너희들의 은혜에 보답하마! 내 너희들에게 아무런 생활 대책도 세워주지 못한 못난 형이요 단장이었지만 앞으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활 방편을 만들어 주마….)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감두한의 눈은 축축히 젖어 있었다.

선거란 참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도무지 예측을 불허했다. 그처럼 김두한이 정의에 호소하고, 부하들의 피나는 협조와 노력이 있었음에도 돈 많은 토박이 김영환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후 또 수원에서 출마했으나 이병희에게 쓴 고배를 마셨다. “아, 억울합니다, 형님!”“이거 이럴 수가 있습니까?”“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이건 너무 하군요!”분을 참지 못한 부하 참모들은 엉엉 울면서 한 마디씩 넋두리를 했다.“야, 사나이 대장부가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졌다고 그렇게 비감하고 약한 꼴을 보여선 안돼! 언젠가도 내가 얘기했잖아. 싸움에 지고 이기는 것은 병가지 상사라고.”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김두한은 자신도 몹시 허탈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비감해하는 부하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렇게 좋은 말로 달래는 것이었다.(비록 의정단상에는 못나갔지만 앞으로 할 일이 너무도 많아.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바빠서 미뤄놓았던 ‘자활개척단’ 일 말이다.)붉게 충혈된 김두한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격정이 끓어올라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김두한은 선거의 상처를 깨끗이 잊어버리고 ‘자활개척단’을 부활시키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런데 이 때 민주당의 내부는 어땠던가. 이승만 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반독재 투쟁을 계속 했다 해서 국민의 많은 성원과 지지를 받았던 민주당이 아니었던가. 민의원 의원의 총수 233명중 그 3분의 2가 훨씬 넘는 184명의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국회의 기대와 여망을 저버리고 둘로 갈라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장면을 중심으로 하는 신파는 민주당을, 김도연을 중심으로 하는 구파는 신민당 간판을 걸고 집안싸움을 시작했다.“신파는 자유당보다도 더 나쁘다.”“구파는 정권욕에만 눈이 어두운 소인배들이다!’이렇게 사사건건 서로 헐뜯고 싸우니 정치가 제대로 될 리 없고, 안정을 찾으려던 사회는 다시 혼란만 거듭되었다. 장관은 하루아침에도 몇명씩 바뀌고 뚜렷한 정책은 서 있지 않았으며, 그저 파벌을 따라 갈팡질팡이었다.

그런 꼴을 보고 가만 있을 김두한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탁자를 주먹으로 꽝 치며“이 자식들이 이거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데!”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가 이건 사색당쟁의 재판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참으로 한심하고 환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분노와 환멸은 비단 김두한 한 사람에게 한한 것이 아니었다. 전 국민이 공통적으로 갖는 심사요, 분노의 폭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4·19의거를 주동했던 학생들은 다시금 일어나 데모를 벌였고, 실정에 대한 항의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이에 편승한 일부 몰지각한 학생과 불순세력이 야합하여 국회의사당에까지 난입하는 등 사회적 혼란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거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기까지 흔들리겠는데?)<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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