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과학수사파일 제 9 회
대한민국 과학수사파일 제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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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10-27 09:51
  • 승인 2006.10.2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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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흔 사람마다 모두 달라 좋은 증거 될 수 있어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다 (上)

1981년, 서울의 어느 야적장 인조대리석 더미에서 20대 여성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경찰의 조사 결과, 변사체의 신원은 어느 지방 대학의 학생인 Q양으로 밝혀졌다.
Q양은 대학 미술전람회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해 지방에서 상경해 오빠 집에 머물다가 밤 9시 30분경 어떤 여자의 전화를 받고 나갔는데, 3일이 지나도록 귀가하지 않아 가출신고가 되어 있었다.
시체의 검안 및 부검을 통해 사인은 목이 졸려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오른쪽 귀 밑에는 치흔이 발견되었다. Q양은 집을 나갈 때 입었던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맨발이었다. 귀고리와 14K 금목걸이는 그대로 있었고, 끼고 있던 반지와 가지고 나갔던 현금 10여만 원은 없어진 상태였다. 시체가 발견된 야적장 옆 공터 풀숲에서 Q양이 신고 나간 샌들 한 짝이 발견되었을 뿐, 다른 증거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요원들은 곧바로 용의자 수사를 시작했고, 부검시 채취된 혈액, 위 내용물, 질액, 손톱 등을 국과수에 감정의뢰했다. 감정 결과, 피해자의 혈액형은 O형으로 밝혀졌으며, 피해자 질액에서는 정액이 검출되었으나 부패로 인하여 혈액형은 판정되지 않았다. 위 내용물은 소화가 이미 많이 진행되어 음식물의 종류가 식별되지 않았으며, 식후 네댓 시간이 경과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후로도 수차례에 걸쳐 죽은 Q양의 몸에 붙은 음모와 머리카락, 그리고 현장에 있던 담배꽁초 등 많은 증거물이 의뢰되었으나, 음모와 머리카락 등은 모두 피해자의 것으로 증명되었다. 또 담배꽁초는 그 당시 내렸던 소나기 때문에 젖어 있어 타액조차 검출되지 않아 혈액형을 알 수 없었다. 이렇듯 현장에는 범인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별다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사요원들은 용의자 수사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죽은 Q양 주변의 남녀 친구들 100여 명은 물론, Q양과 여름방학 해외연수를 같이 갔던 동기생들을 상대로 일일이 조사했다. 이들 중 사건 당일 낯부터 Q양을 만났던 남자친구 K군을 찾아낸 수사요원들은 그에 대해 집중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K군이 범인이라고 할 만한 물적 증거가 쉽게 발견되지 않아 수사는 딜레마에 빠졌고, 수사요원들은 K군의 범행을 입증할 만한 새로운 증거 찾기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Q양의 시체 발견 즉시 유일하게 확보해 놓은 오른쪽 귀밑에 남아 있던 치흔의 모양이 떠올랐다. 수사요원들은 이 치흔의 모형과 용의자 K군, 그리고 두 명의 다른 용의자 L군 B군의 치열 모양을 국과수 법치학실에 감정의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정 결과, 시체에 남은 치흔과 세 명의 용의자들 중 바로 K군의 치열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감정을 담당했던 법치학 연구팀에 의하면, 치흔은 마치 지문과 같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수사요원은 이 치흔감정 결과를 토대로, 유력한 용의자로 K군을 지목했고, 그를 구속 기소할 경우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용기를 얻은 수사요원들은 증거 보강에 더더욱 박차를 가했다. 시체 발견 장소에서 약 10여 미터 떨어진 어느 여관 담벼락에서 모발 1점을 발견하여 채취했고, 여관 주변 하수구, 길목 등 6개 장소에서 모발 46점을 채취하여 감정의뢰했다. 그러나 감정 결과, K군의 범행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여관 담벼락에서 채취한 모발은 길이 6센티미터로 Q양의 혈액형과 동일한 O형이었는데, 모발이 단 1점뿐이었으므로 형태에 의해 Q양의 모발인지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결국 K군은 연행 15일 만에 범행 혐의를 벗고 풀려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기자들을 만난 K군은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자백하게 된 것은 언론에 책임이 있습니다. 풀려난 것으로 만족하며, 경찰에서의 일은 일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억울합니다. 저는 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입니다. 저는 결코 그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건 수사를 계속 지켜본 기자들은 K군이 Q양을 죽인 범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의문점이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렇듯 한 여대생의 죽음이 몰고 온 사회적 여론은 증거 위주 과학수사의 부재와 용의자의 인권보호 차원에서 검찰 경찰의 수사관행에 또 다른 문제의식을 던져놓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듯했다.
그 이듬해 K군이 풀려난 지 약 100여일 후, 각 일간신문에는 ‘Q양의 피살사건, 범행자백 D군 살해혐의 구속’, ‘승용차 시트커버 O형 혈흔 물증으로’라는 충격적인 기사가 실리면서 이 사건은 또 한 번의 반전을 거듭했다. 그런데 이 기사는 바로 그 전날 내가 감정을 끝냈던 승용차 시트커버의 혈흔 감정 내용이었다.
그것이 과학수사의 부재, 용의자의 인권 등 그 말 많던 여대생 Q양 살인사건에 관련된 증거물이라는 것을, 나는 신문을 보고 비로소 알았다. 연구소에 발을 디딘 지 2년 남짓, 초년병 시절인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상급자에게 본의 아니게 미리 보고를 하지 못한 죄책감에 대한 곤혹스러움과 괴로운 마음이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았던 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상 Q양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됐던 K군이 풀려나면서 검찰과 경찰에서는 암암리에 수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이 사건은 보도도 잠잠하여 사람들에게서 점차 잊혀져갔다. 물론 이 사건에 관련된 증거물 증거의뢰도 이 기간 동안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돌연 그 다음해, H검사가 증거물 감정을 위해 실험실을 방문했다. 증거물은 승용차 시트커버 7매를 비롯하여 손수건 1매, 휴지 6매, 면장갑 2켤레 등이었다. 그런데 의뢰서에는 사건 내용이 없었고 다만 살인사건 수사에 필요한 증거물이라고 쓰여 있었다. H검사에게 사건내용을 물어보아도 사건의 중요성 때문에 알려줄 수 없으며, 보안유지에 신경 써 달라고 했다.
이들 증거물의 감정 결과는 시트커버 7매에서만 직경 1밀리미터 내외의 O형 혈흔이 10개 부위에서 검출되었고, 나머지 손수건 등 증거물에서는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 이 감정서는 즉시 회보되었고, 결국 새로운 용의자 D군으로부터 자백을 받아 구속했다는 신문기사가 보도된 것이다.
그 후 20여 일이 지나 검찰은 Q양의 살해범은 또 다른 해외연수 동기생인 D군이라고 발표했다. 검찰은 원점에서 다시 수사를 시작, 이 사건 관련자 120명에 대한 재수사를 한 결과, 용의점이 발견된 D군을 추궁한 끝에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고 밝혔다.
한편 D군의 승용차 시트커버를 국과수에 감정의뢰한 결과, 살해된 Q양과 동일한 혈액형인 O형의 혈흔이 검출됐다는 통보를 받았고 임의성 있는 자백을 받았기 때문에 D군을 범인으로 단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검찰은 사건 발생 130일 만에 살인, 사체유기 및 절도혐의로 D군을 구속했고, Q양 살해범으로 불구속 송치했던 K군에 대해서는 무혐의 불기소한다고 발표했다.
검찰 수사결과 D군은 Q양 피살 추정일 당시 미술전람회 관계로 상경, 오빠 집에 묵고 있던 Q양을 불러내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 드라이브를 한 다음, 여관에 함께 갈 것을 요구했으나, Q양이 완강히 거절하며 욕설과 함께 뺨을 때리자 순간적으로 Q양의 얼굴을 주먹으로 쳐 실신시킨 뒤, 목을 졸라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D군은 시체를 여관 앞 인조석 더미에 숨긴 뒤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Q양이 갖고 있던 현금 10여만 원과 반지를 챙겼으며, 3일 뒤 학교 가는 길에 모 전철역 쓰레기 더미에 반지를 버렸다고 자백했다. 한편 사건 당일 전화로 Q양을 불러낸 경상도 말씨의 여자는 D군의 친척임이 드러났다. D군은 작년 7월 연수차 미국에 갔을 때 Q양과 알았으나, Q양이 연수 동기생인 K군과 가까이 지내자 Q양을 원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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