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여 일 후 항소심 선고공판이 또 열렸다. 재판부는 1심에서와 같은 이유로 D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마침내 D피고인은 검찰에 구속된 지 309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온 D군에게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다.
-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왜 자백했는가?
“당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고,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하기도 역겨울 정도입니다. 겸찰의 과오는 이번 재판으로 드러났다고 봅니다.”
-숨진 Q양과의 관계는?
“해외연수 때 알았을 뿐,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심정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풀려난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공정한 판결을 내려준 재판부에 감사합니다.”
D군은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그 이듬해 대법원 형사1부는 D피고인에 대한 살인, 시체은닉 및 절도 피의사건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D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은 정당하다”며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D피고인이 구속된 지 597일, 대법원에 상고된 지 286일 만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이로써 Q양의 피살사건은 사실상 미해결로 남게 되었다. 증거 없는 형벌을 엄격히 배척한,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다”라는 말이, 마치 유행어처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수없이 많은 증거물을 감정 분석했으나 법정에선 검찰 측과 피고인 측의 끝없는 논쟁만이 오고갔을 뿐이었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들만 남긴 채, 결국 재판부에서 “D군의 검찰에서의 자백은 임의성은 인정되나 신빙성은 없다”는 무죄 이유를 밝힘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범인은 어디에 있으며 누구일까? 사건의 진상은 영영 미제의 무덤에 묻히고 만 것일까? 그 어느 사건보다도 심판 과정에서 제시된 증거와 자백, 유죄와 무죄, 임의로운 자백과 그 신빙성 등의 문제들이 첨예하게 대립된 채, 두고두고 우리 사법사의 유산으로 남은 사건이 되었다.
<끝>
몇십 년 만의 해후
20억대의 재산가인 85세 노인이 병환으로 몸져누워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 14년간 함께 살아왔다.
자식도 낳아 중학생인 아들이 있었고, 여자도 50세가 넘은 중년의 부인이 되었다. 그들은 화목한 가정을 꾸려왔다. 그러나 이들 가족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14세 된 아들을 그동안 아버지의 호적에 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라도 부인은 아들을 호적에 올리기로 결심하고 시도를 했지만, 끝내 고령의 남편은 그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기에 절대로 호적에 올릴 수 없다고 했다.
부인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법원에 진정했고, 법원에서는 재판에 필요한 친생자 확인 여부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해 왔다.
담당 수사요원은 이들 세 사람의 혈액을 채취하여 연구소로 가져왔다. 먼저 이들 혈액에 대한 ABO식, MN식, Rh식, Lewis식 등의 혈액형과 HLA-A, B, C, D, DR 등 약 80여 종의 백혈구 HLA형을 검사했다.
이들 감정 결과를 검토해 과연 부모로부터 일정한 유전법칙으로 백혈구형이 유전되었는가를 분석했다. 혈액형의 결과로는 친생자로서의 부정이 발견되지 않았다.
혈액형의 유전법칙은 긍정의 가능성을 광범위하게 포함하는 검사이기 때문에 친생자 확인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이 문제의 아들은 백혈구형 검사에서 지목된 아버지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유전자가 유전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는 DNA 분석법이 도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백혈구형 검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목된 아버지와의 친생자 관계가 아니라는 감정 결과를 감정서로 작성, 법원에 통보했다. 재판의 결과는 부인의 패소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다 캄보디아에 사는 훈 할머니의 고향과 친족을 찾아주자는 기사가 언론매체를 통해 일제히 보도된 바 있었다.
훈 할머니는 안타깝게도 고향도, 부모형제도 까맣게 모르고 우리말도 모두 잊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을 찾는 일이 더욱 절실했다. 그의 남동생이라고 나선 K씨(61세)의 가족이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끌려간 ‘김남아’가 바로 훈 할머니 같다고 주장하며 한국으로 돌아와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훈 할머니가 진짜 혈육인지 명확히 가려야 했다.
그러나 DNA 분석에 의해 훈 할머니는 그들과의 혈육이 아니라는 것으로 판정이 났다. 지속적으로 그의 가족을 찾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회단체는 물론 정부의 노력으로 그의 과거 행적을 역추적해 나갔다. 마침내 또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DNA분석을 통해 훈 할머니는 가족은 물론 고향을 찾는 데 성공했다.
친생자 감정이란 문제의 자녀가 과연 지목된 부모에게서 출생한 자녀인지, 또는 문제의 부모가 지목된 자녀의 진짜 부모인지를 생물학적 방법으로 검사하는 원리다.
친생자 감정 방법으로는 혈액형, 백혈구형, DNA형 등에 의한 유전학적 검사가 있으며, 지문(指紋), 족문(足紋), 손금, 얼굴모양, 신체 계측치 등의 형태학적 특징 검사, 그리고 문제의 자녀 출생일과 수정일의 추정검사에 의한 산과학적(産科學的) 검사 등이 있다. 그중 혈액형, DNA분석법 등에 의한 유전학적 검사가 가장 정확하며, 기타 검사는 보조적인 검사법으로도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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