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한권의 책이 인생을 바꾼다2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추석특집, 한권의 책이 인생을 바꾼다2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 전성무 기자
  • 입력 2010-09-17 11:45
  • 승인 2010.09.17 11:45
  • 호수 856
  • 3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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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현실인식 유쾌한 상상
“언젠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햄릿이라는 인물이 비현실적이라는 한 독자의 질문에, “이보게, 젊은이. 햄릿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자네보다 훨씬 더 살아 있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대목을 읽다가 문득, 나라는 인간과 내 소설의 관계 역시 그와 비슷하지 않은가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라는 존재는 어지러이 둔갑을 거듭하는 허깨비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살아 있”는 것은 지금껏 내가 쓴 것들일 것이다.

그 책들이 풍랑에 흔들리는 조각배 같은 내 영혼을 저 수면 아래에서 단단히 붙들어주는 것을 느끼곤 한다.”-소설가 김영하.

소설가 김영하(42)씨가 2004년 ‘오빠가 돌아왔다’ 이후 6년 만에 단편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를 발표했다. 김영하는 가장 젊은 감각을 대변하는 ‘젊은 작가’로 통한다. 그동안 ‘빛의 제국’과 ‘퀴즈쇼’ 같은 장편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여 왔으나, 언제나 가장 현재적인 감성, 가장 도시적인 이야기로 무장한 단편소설로는 ‘오빠가 돌아왔다(창비, 2004)’ 이후 6년 만이다.

무엇보다 이번 신작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은 대개가 문예지의 청탁 없이, 작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먼저 쓴 소설들이다. 그중 몇 편은, 어떤 지면을 통해서도 선보인 적이 없는 미발표 작들이다. 그의 단편작을 기다려온 독자들에겐 더욱 신선한 선물이 될 것이다.

김영하는 그간 단편들에서 현대적 감수성과 특유의 속도감으로 일상의 결정적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하며 동시대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이번 작품집은 그 정점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간결하고도 명쾌한 문장에 실려 있는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유쾌한 상상력, 섬뜩한 아이러니는 이야기가 짧아진 이상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

작가는 이야기의 현장에서 한발, 아니 멀찌감치 물러나, ‘지금-여기’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사건’의 한 장면을 칼로 도려낸 듯 그대로 가져와 우리 앞에 부려놓는다. 시간과 공간이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3차원의 세계에서 2차원 평면의 세계로, 텍스트로 바뀌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사건’은 그러나, 지금 이곳, 그러니까 도시 저쪽(혹은 이쪽)의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일상’의 한 부분에 다름 아니다. 확실히, 김영하의 소설은 진화하고 있다.

그의 새 소설들을 마주하고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소설 속 ‘사건’은 어느 순간, 일체의 다른 과정 없이 곧장 ‘나’의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이 때문에, 더 벌어져버린(어쩌면 새롭게 생겨난) 작가-텍스트-독자 사이의 거리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은 무한대로 재생산된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그 빈 공간에서.

그렇다면, 바통은 이제 독자에게로 넘어온 것이다. 작가가 ‘가공해낸’ 이야기(와 그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감동을 받고, 작가의 감상을 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 세상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그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하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 외에는.

[전성무 기자] lennon@dailypot.co.kr



#작/가/의 한/마/디

“원고료도 없는 글을, 오직 쓰는 것이 좋아서, 그것을 가지고 다른 이들과 교감을 나누는 그 순간들이 좋아서, 밤을 새워 단편소설을 쓰던 날들이었다. (… …) 이제는 가끔 마음이 내킬 때면 가벼운 마음으로 단편소설을 쓰곤 한다. 대체로는 청탁 없이, 마치 첫 단편을 쓸 때 그러했던 것처럼, 작곡가가 악상이 떠오를 때 그렇게 하듯, 그 순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적어나간다. 어쩌면 나는 아주 멀리 돌아 처음 시작한 지점으로 돌아와 있는지도 모른다.”_김영하



##[저자소개 김영하(金英夏)]

보편성을 담보하는 소설의 주제의식과 트렌디한 소재를 통해 동시대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저자 특유의 통찰력과 문제의식으로 전 세계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는 소설가 김영하. 단편들에서 현대인의 고독과 단절, 타인과의 연대에 대한 무능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명쾌하고도 아이러니하게, 또한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며 독특한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장편들에서는 독자들에게 늘 새로운 실험을 선보여 왔다. 강원도 화천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진해, 양평, 파주, DMZ, 잠실 등 전국을 주유하며 성장했다. 연세대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후 헌병대 수사과에서 군역을 마친 그는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을 가지고 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두드려본다. 첫 단추는 낙선. 그러나 그 해 봄 그는 문화비평지 ‘리뷰’에 이 작품을 보내 바로 등단해버린다.
두 권의 작품집과 한 권의 장편 소설을 내면서 기발하고 만화적인 상상력, 인간소외, 죽음, 사이버 시대의 일상성 등을 다룬 묵직한 주제들, 소설의 전통적 원칙을 파괴하는 도전성, 자학과 조롱에 섞여드는 번뜩임 등으로 가장 주목받는 젊은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소설들은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이탈리아, 중국, 네덜란드, 폴란드, 터키 등에 판권이 수출되어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고 있다. 2004년에는 한 해 동안 동인문학상, 이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었다.
소설집 ‘호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오빠가 돌아왔다’,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아랑은 왜’, ‘검은 꽃’, ‘빛의 제국’ , 산문집 ‘포스트잇’, ‘랄랄라 하우스’, ‘퀴즈쇼’, 영화산문집 ‘굴비낚시’, ‘김영하ㆍ이우일의 영화 이야기’가 있다. 최근에는 전 세계 여덟 개 도시를 여행하고, 각 도시에서 쓴 짧은 소설과 직접 찍은 사진, 여행 일화를 한 권의 책에 담는 ‘여행자’시리즈를 집필하고 있다.

전성무 기자 lennon@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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