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검절약’ 몸 소 실천, 경방의 틀 마련하다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어머니의 힘>(한결 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중이다. 다음은 경방 김각중 명예회장의 어머니 김점효 여사 이야기다.김점효 여사는 1901년, 호남 제일의 갑부로 알려진 김경중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가 여사의 오빠들이다.
오빠가 중앙학교와 고려대학을 운영한 교육자 집안이었음에도 김점효 여사는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일찌감치 출가하게 되었다.
당시의 초혼 풍습대로 17세 되던 해에 세 살 아래인 14세의 김용완(호는 동은, 전 경방 회장)과 결혼하여 슬하에 김각중 등 1남 4녀를 얻었다.
김점효 여사의 아버지와 동은의 할아버지는 친구였다. 두 분 친구 사이에 자연스레 혼사 말이 오가자 오빠 인촌은 신랑감을 만나기 위해 교동보통학교로 동은을 찾아갔다. 동은을 만나보고 돌아온 인촌은 “실랑 감이 아주 순진하고 좋아 보인다”고 평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동은이 교동학교를 졸업한 지 두 달 후인 1917년 5월에 치러졌다. 만석꾼 집안의 막내딸 혼인이라 전라도 일대는 물론 서울까지 소문난 잔치였다.
신부의 아버지와 시할아버지는 신랑, 신부가 너무 어려 식만 올리고 합방은 시키지 않기로 정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합방을 제안해 신랑, 신부는 한방에 들 수 있었다.
김점효 여사는 어릴적 부터 큰 인물이 될 만한 배포와 자질로 주변사람들에게 총애를 받았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성품과 소질,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욕심과 성취욕이 강했다.
오빠들이 출중한 인물들 이었건만 아버지 김경중 공은 막내딸이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못내 아쉬워할 정도였다.
김점효 여사는 친정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시집의 규범에 어긋나지 않도록 처신했다.
시집 온 뒤 3년 동안 마늘 간장으로만 밥을 먹었고,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댁의 재산은 많지 않았지만 충청도에서 이름난 양반 집안답게 손님과 머슴 등이 매일같이 쉰 명 정도 들락거렸다. 그 뒤치닥거리가 모두 김 여사의 몫이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김 여사는 아랫사람들에게까지 항상 낮은 자세로 임했다.
배움의 꿈을 접은 김 여사는 그 아쉬움을 자식들에 대한 교육의 열로 승화시켰다. 집안 살림에 여유가 없었지만 넷이나 되는 딸들의 교육에 적극적이었다. 현중과 인중 그리고 막내 명예를 멀리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일에 김 여사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모두가 공부를 할 만큼 했다는 것만으로도 김점효 여사의 일생은 뜻 깊어 보인다. 뿐더러 큰 아들 김각중과 사위 넷이 모두 박사라는 사실은 김점효 여사에겐 하나의 긍지였다.
남편이 차남이었지만 김 여사는 시아버지의 노후는 물론 시동생들 부양까지 맡아야 했다. 김 여사는 대범한 성격이긴 해도 살림꾼으로서는 근검절약과 내핍이 몸에 벤 구두쇠였다.
시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분배받아 살림을 내고, 남자 못지않은 억척스러움으로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나갔다. 당신 친정보다 더 잘살아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졌고, 인재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뛰어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남편은 사업상이라는 이유로 날마다 술을 마셨다. 교통편이 마땅찮던 그 시절, 전철에서 내려 3~40분을 걸어 집에 도착하면 시간은 언제나 자정이 넘었다. 그때까지 김 여사는 남편을 기다렸다. 그럴 때마다 남편 동은은 더 이상 아내에게 마음고생을 시키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하지만 이튿날이면 다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 김 여사는 동은의 건강을 염려해 죽을 끓여주며 정성을 다하였다.
20세기 어머니의 자화상
젊은 시절의 검약과 부지런함 덕분인지 김 여사는 고령의 나이에도 농장에 나가 손수 농작물을 가꾸는 것을 즐겼다. 수확한 농작물로 자식들에게 메주를 쑤어 나눠주기도 하며 나이에 비해 활동적인 노년을 보냈다.
동은은 집안일을 아내에게 모두 넘기고 간섭하지 않았다. 이것은 동은이 그만큼 아내의 부덕을 높이 평가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김 여사는 현실적인 사리판단도 남달랐다.
하루는 아들에게 갈 데가 있으니 함께 나서자고 했다. 아들 김각중 회장과 함께 찾은 곳은 경기도 광주의 어느 산기슭이었다.
“땅을 잘 본다는 지관의 말을 들어보니, 이 산이 명당 터라고 하더구나”
김 여사는 어느 틈에 남편과 함께 묻힐 묘지 터까지 물색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뜻이 워낙 완강해 아들은 이 땅을 사기로 결심했다.
1995년 김 여사는 그 땅에 당신을 의탁했고, 반년 후쯤에는 남편도 그곳에 합장되었다. 둘 모두 다복하게 김 여사는 95세, 남편 동은은 92세의 장수를 누렸다.
주변 사람들은 남자로 태어났으면 정말 큰일을 했을 거라며 김 여사의 자질을 아까워했다. 김 여사와 대화를 나누어 본 이들도 그의 기백과 큰 뜻을 익히 기억하고 있다. 아들 김각중 회장 또한 김 여사가 시대에 맞게 공부를 했더라면 안팎으로 큰일을 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인정받고, 남편에게 신뢰와 사람을 받고,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삶은 산 ‘20세기의 어머니상’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그의 일생은 자랑스러운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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