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유내강의 포근한 한국의 어머니상”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어머니의 힘>(한결 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중이다. 다음은 쌍용건설 김석준 회장의 어머니 김미희 여사 이야기다.
김미희 여사는 1920년 9월 21일(음력), 아버지 김양한 공과 어머니 박필연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반 집안의 처자답게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여고 시절에는 기숙사 생활을 한 모범생이었다.
당시 기숙사 생활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장작불로 밥을 짓고, 사감선생님의 식탁까지 차려야 하는 고된 일과로 시작되었다.
부모님은 딸이 여고를 졸업한 후 서울로 진학하기를 원했지만, 김미희 처자는 교원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교원 생활을 하던 중 평생의 반려자인 김성곤(쌍용그룹 창업회장)을 만나게 된다. 중매에 의해서였다. 성곡의 조카가 졸업음악회에서 김미희 학생을 본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성곡의 어머니는 혼사를 미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서둘러 아들과 함께 포항으로 가서 김미희 처자의 어머니를 만났다. 이 때 성곡을 만난 김미희 처자의 어머니 박필연 여사는 사위 후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곡의 외모가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곡쪽의 반응도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다. 신부감이 안경을 껴야 할 정도로 시력이 나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도 집안끼리 몇 차례 왕래가 있은 뒤,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선을 본지 석달만의 일이다.
1973년 6월 17일, 초여름의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날, 포항 영흥보통공민학교 강단에서 신식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신랑은 스물다섯 살, 신부는 열여덟 살이었다. 당시 주례를 맡은 분은 신부가 재직하던 공민학교의 설립자 김용주 교장 선생님이었다. 김용주 선생은 전방 회장과 경총 회장을 역임했고, 신랑 성곡은 쌍용그룹 회장과 대한상의 회장을 지냈으니, 재계의 지도자가 될 두 사람이 주례와 신랑으로 인연을 맺게 된 셈이다. 특히 성곡이 비누 제조회사인 삼공합자회사를 설립해 사업에 첫발을 내디딜 때에는 김용주 회장이 직접 도움을 주기도 했다.
신혼 당시 은행원이던 성곡은 한 번도 월급봉투를 신부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 월급을 몽땅 사업에 투자한다는 게 성곡의 설명이었다. 다행히 집안의 생활비는 시어머니가, 쌀과 땔감은 친정이 대주어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배포 큰 남편의 그 사업이라는 게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저축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도 아닌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교제비로 월급을 몽땅 섰던 것이다. 월급을 그렇게 술값으로 전부 써버니리 성곡의 주머니는 늘 비어 있기 마련이었다.
김 여사는 생각 끝에 빈방을 이용해 하숙을 치기로 했다. 많을 때에는 하숙생을 4명까지 받아들여 집안이 항상 어수선했다.
정치 보복, 새 삶의 시작?
1971년, 내무장관 해임 안에 찬성한 남편 성곡에게 정치적 시련이 닥쳤다. 성곡은 국회의원 자리와 당직을 사퇴하고 공화당에서도 탈당했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도 찾을 겸 열정과 애정을 쏟아 부으며 일하던 양회공장을 방문했다. 성곡을 감시하는 임무를 띤 두 명의 정부 요원도 함께 동행했다. 성곡이 집을 떠난 후 걱정 때문에 하룻밤은 뜬 눈으로 지새운 김 여사는 남편과 같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성곡이 동해 공장에 들렀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그리로 향했다. 평소 남편이 일할 때는 함께 있는 것을 꺼리던 김 여사였지만, 이날은 무작정 직원을 앞세워 성곡이 있는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틀 후, 한밤중에 등산복 차람의 방일영과 최세경이 찾아왔다. 막역한 사이인 두 사람을 외진 호텔에서 만난 성곡은 크게 기뻐했다. 성곡은 김 여사에게 몇 번이고 다른 방을 구해 잠을 자라고 권했지만, 남편의 지인들이 반갑기는 김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김 여사는 남편과 남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차분하게 불경을 읽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자리가 불편했을 테지만 이날은 다른 때와 달리 새벽녘까지 차분하게 불경을 읽을 수 있었다. 어려운 시기이기에 부처님의 자비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했고, 그만큼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더욱 깊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 여사는 여성들의 활동을 돕는데도 적극적이었다. 1966년 가을, 여성 연극인들이 ‘여인극장’이라는 극단을 창단하는데, 창단식을 거행할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 여사는 자신의 신문로 집을 창단식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김 여사는 명맥이 끊긴 우리의 전통 다도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한국 차 문화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일지암 복원에 앞장섰고, 1979년 한국차인회가 출발할 때도 그 중심에 김 여사가 있었다.
또 자신의 환갑잔치 비용을 몽땅 다례 발표회를 위해 썼을 정도로 다도에 열정을 다했다.
김 여사는 회사의 비누 판매 일선을 누비기도 했고, 공장의 도둑을 지키기 위해 숱한 밤을 설치기도 했다.
그리고 남편이 떠난 뒤, 추억조차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지난날의 사진을 불태웠다. 이처럼 김 여사는 외유내강에 포근하면서도 깔끔한 성품을 지닌 여인이었다.
하지만 성곡의 사랑이 그리워서일까. 62세 되던 1981년 9월, 김미희 여사는 자식들의 애도 속에 남편이 먼저 간 길을 따라 떠났다.
자손들은 고인의 10주기 추모식과 때를 같이해 유고집인<명원다화>를 출간하였다. 1999년에는 한국 다도의 전통 복원에 힘쓴 여사를 기려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지금은 여사의 둘째딸 김의정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이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7호 궁중다례 보유자로 지정받고 어머니의 대를 이어 다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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