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 재계진출 들여다보기 제3탄 아가동산
종교계 재계진출 들여다보기 제3탄 아가동산
  • 강필성 기자
  • 입력 2009-06-30 11:11
  • 승인 2009.06.30 11:11
  • 호수 792
  • 2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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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신나라 사옥

오늘날 종교단체가 기업을 설립해 재계에 진출한다는 말은 새삼스럽지 않다. 이미 숱한 기업들이 종교계에서 파생됐으며, 활발한 사업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종교의 재정을 토대로 막대한 부를 끌어모으는 기업들이다. 이들은 좀처럼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재벌 못지않은 알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는 것이 재계의 평가다. 〈일요서울〉은 재계에 진출한 종교재단의 기업을 연속 기획을 통해 조명해 봤다.

30~40대 중 신나라레코드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음반매장에서만 음반을 구할 수 있는 시절, 신나라레코드는 국내 음반판매량 1~2위를 다투는 음반유통사였다. 신나라레코드에서 손대는 음반마다 대박을 터트리며 국내 음반사 중에서도 큰손으로 자리 잡았었다. 하지만 한때 시대를 풍미한 이 음반매장이 아가동산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아가동산 사건 후유증

아가동산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6년 말 사이비종교 논란에 휘말리면서 부터다. 아가동산은 엄밀히 말해 종교단체가 아니다. 아가동산 측은 종교단체가 아닌 협업마을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런 주장은 1998년 대법원에서 인정받은 바 있다. 즉, 아가동산은 종교와 무관한 협업마을(공동생활마을) 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교계 일각에서는 아가동산을 종교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1996년 당시 피해자들이 김기순씨를 교주라고 주장했던 점이나 ‘신(新)나라’라는 표현이나 ‘구세주’를 선포하는 등 종교적인 색체를 띄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아가동산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대법원 판결을 비판해왔다. 특히 주간 <교회와 신앙> 기자인 양봉식 목사는 소송을 통해 “아가동산이 사이비 종교 집단이 아니라고 확인받았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아가동산은 신나라레코드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1982년 아가동산이 설립되면서 신나라레코드에 아가동산의 노동력과 운영자금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아가동산은 1982년 12월에 서울 용두동에 레코드유통업체인 신나라유통을 설립하고 농장에서 나오는 이익금으로 킹스레코드 등 기업을 설립, 운영했다. 5평짜리 조그만 레코드 가게에서 시작한 이 사업은 독특한 소매 전략과 현금 전략 덕분에 빠르게 성장했다.

아가동산 출신 조모씨는 “신나라유통 경쟁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2001년 아가동산을 나온 그는 “당시 아가동산 구성원들이 16시간 무보수 노동에 주야를 가리지 않다보니 타 경쟁사와는 경쟁 자체가 불가능했다”며 “초기에 불법 복제 등으로 시작된 사업은 몇 년만에 거대 음반사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실제 90년대 중반 신나라레코드는 하나의 문화키워드이자, 대형 음반사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문제는 1996년 아가동산 이탈자들의 폭로가 시작되면서 비롯됐다. 아가동산을 탈출한 일부 농장 주민이 살인 및 사기혐의로 김기순씨 등을 고발한 것. 아가동산의 핵심인물들이 줄줄이 기소되며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아가동산 피해자라 주장하는 30여명은 “아가동산은 김기순을 교주로 한 사이비 종교집단이며 지난 87, 88년 신도 2명을 무참히 살해했고 이중 한명을 암매장했다”고 주장했다. 또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정·광복절·성탄절과 교주생일 등 1년에 4일만 쉴수 있었고 TV시청과 신문구독은 물론 외부출입과 가족면회도 제한됐다. 심지어 부부라도 동침이 허용되지 않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호부호형이 금지됐다.

결국 김기순씨는 1998년 6월 대법원에서조세포탈·폭행·횡령 등 죄목에 대해 유죄가 인정돼 징역 4년 및 벌금 56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매장된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김기순씨의 살인이나 사기 등 주요 혐의는 무죄가 선고 됐다.

이 사건은 아가동산에서 설립한 신나라레코드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기가 됐다. 당시 조세포탈 및 혐의에 유죄를 받으면서 신나라유통 사옥 및 보유한 토지 등이 상당수 압류됐던 것. 신나라유통 폐업이 결정된 것도 이맘때다. 기존 신나라유통이 가진 신나라레코드 매장과 물류 기능은 새로 설립된 미디어신나라로 넘어갔다. 사실상 법인 갈아타기가 이뤄진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도 미디어신나라의 배경에는 여전히 아가동산이 자리하고 있다. 미디어신나라의 대표이사인 홍삼의 사장 주소지는 여전히 아가동산인 이천시 대월면 대대리로 돼 있다. 그밖에 주요 주주인 김남익씨 등의 주주 역시 아가동산 소속이다.

아가동산 사건으로 신나라레코드의 명성은 상당부분 퇴색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당초 한때 350여명이었던 아가동산의 구성원은 현재 60여명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미디어신나라의 사업성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2000년 들어 온라인 음원사업이 활성화 되면서 음반업체의 타격이 심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미디어신나라는 여전히 오프라인 매장을 중점으로 영업했고 결국 온라인으로 전환되는 국내 음반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했다.

신나라레코드 관계자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라며 “이제 적자나는 음반사업을 유지하는 것은 순수 문화사업에 대한 소명감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음반침체기 딛고 설수 있나

미디어신나라에 따르면 현재 매출은 전성기 때 매출의 10%도 안된다고 한다. 그만큼 음반시장이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 미디어신나라의 2001년 매출은 824억8400만원으로 15억9900만원의 순이익을 기록했지만 지난해 매출 273억2300만원. 순손실만 16억4900만원에 이뤘다.

미디어신나라 관계자는 “지금은 온라인 음원시장이 활성화 되고 있지만 분명 오프라인 음반시장은 다시 살아날 것”이라며 “그때 대형 유통망을 갖춘 미디어신나라가 음반업계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 것”라고 기대했다. 1990년대 말 아가동산 사건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신나라레코드가 예전 같은 전성기를 찾을 수 있을지 시선이 집중된다.



#아가동산이란?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 대대리 임야에 위치한 협업마을. 1982년 김기순씨 주도로 세워졌다. 김기순씨는 일명 ‘삭발교’로 알려진 이교부씨의 제자로 알려졌다. 1998년 당시 검찰에 따르면 김기순씨는 내부적으로 ‘아가야’로 통하며 막대한 권한을 갖고 있다.

아가동산 설립에는 약 350명의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떡 장사와 어묵 장사, 불법 테이프 장사에 나섰다. 아가동산은 돈이 조금 모이자 경기도 이천에 땅을 사서 농장을 만들고 사람들을 정착시켰다. 이 농장이 바로 현재의 아가동산이다. 만평으로 시작한 농장은 금세 불어나 지금은 14만평으로까지 늘었다.

[강필성 기자] feel@dailysun.co.kr

강필성 기자 fee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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