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호동>

2010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폐막작으로 선정된 국립발레단의〈왕자호동〉
지난 2009년 국가대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초연을 했던 국립발레단의〈왕자호동〉이 2010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수정 • 보완된 모습을 선보인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라는 가장 한국적인 설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발레 작품이라는 점에서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에 참여하는 여러 국내외 관객들에게 많은 감동을 전할 것이라 예상된다. 지난 해의 초연 버전에서 가장 많이 변화된 점은 연출과 안무, 그리고 음악이다. 2막의 시작을 장식하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보여주었던 결혼식 장면이 1막의 끝으로 자리를 옮겼고, 1막의 고구려 전쟁장면과 2막에서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기 전에 내면의 갈등을 겪는 장면에서는 화려한 북춤이 추가되어 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서양에 셰익스피어가 있어 비극적인 사랑을 탁월하게 묘사했다면, 동양에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라는 설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설화는 셰익스피어 시대보다 훨씬 오래 전인 고구려 시대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낙랑공주라는 가장 한국적인 여인상이 등장하여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주제인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발레〈왕자호동〉의 줄거리는 저 유명한〈로미오와 줄리엣〉보다도 더 비극적이고 더 오래된 러브스토리로서 남녀 사이의 사랑을 넘어서 우리 한국인 특유의 인간애를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탁월한 소재다.
대본 및 연출을 담당한 국수호는 "사랑 때문에 부모와 조국을 단념한 낙랑공주를 따라서 자결하는 호동왕자를 통해서 고결한 죽음에 대한 현대인들의 가치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관객들에게 주고 싶었다."고 말하며 "작품이 끝난 후에도 비극적인 여운이 길게 남아 관객들의 가슴을 울리게 하고 싶다."는 연출 의도를 밝혔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향한 발레〈왕자호동〉
반 세기 국립발레단의 역사 속에 많은 우리의 작품들이 있었다.〈고려애가〉,〈춘향의 사랑〉,〈처용〉,〈지귀의 꿈〉,〈배비장〉등. 하지만 서양에 비해 늦었던 발레의 도입으로 상대적으로 테크닉이 뒤쳐져 있을 당시에 우리의 이야기를 서양에 알리는 것은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제 세계 유수의 발레 콩쿠르와 해외공연에서 당당히 그 실력을 인정 받는 국립발레단이 한국을 대표하는 우리만의 작품을 당당히 세계에 선보인다.
단순히 한국무용 춤사위를 변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세계가 잘 이해할 수 있는 클래식한 움직임에 우리 문화적 요소들을 덧입혀 우리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편하고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를 알리고 이해하게 만들어진 작품이 다름 아닌〈왕자호동〉이다.
왕자호동 설화는 극적인 구성으로 되어 있어, 그것 자체가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특히 낙랑으로 대표되는 한족과 호동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족 간의 갈등을 신화와 전설에서 볼 수 있는 신기 쟁탈의 화소(話素)의 원형에 넣어 형상화하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으로서도 빈틈없는 구성이라 할 수 있다. 발레<왕자호동>은 이런 우리만의 문학적 텍스트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가, 전쟁, 사랑, 배신, 죽음, 윤회, 주술을 테마로 하여 고전적 감성에 현대적인 테크닉을 세심하게 반영해 2막 12장의 화려하고 웅장한 작품으로 탄생되었다.
세계무대로 나아가기 위해 서양의 예술장르를 우리의 고유문화와 결합시켜 21세기 한국 문화의 세계화에 모범 사례를 제시할 발레〈왕자호동〉
오직〈왕자호동〉을 위한 드림팀
1977년 당시 국립발레단의 초대 예술감독이던 故 임성남은 아리아 고로가 안무한〈호두까기인형〉을 국내에 소개했다. 국내 최초의 외국인 안무 작품이었다. 이후 국립발레단은 줄곧 정통 클래식발레의 정수를 체득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왔으며, 따라서 주로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 역시 서양의 것들이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생각과 ‘발레가 서양에서 시작했지만 우리 안무가가 우리의 소재로 한국적인 발레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는 80년대에 들어와서야 생긴 것이었다. 한국의 80년대는 문화사적으로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우리문화의 세계화와 선진공연예술에 대한 관심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였기 때문에 국립발레단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의 대국민적 정서를 반영하여 제작된 것이 1988년 임성남이 안무한〈왕자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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