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 사랑 방정식이란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
맹목적 사랑 방정식이란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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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02-23 13:50
  • 승인 2010.02.23 13:50
  • 호수 26
  • 5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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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치명적 유혹…남자가 위험하다

누구나 한번쯤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사랑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번쯤 누군가로부터 맹목적인 사랑을 ‘대시’ 받아 본 적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은 누구나 늘 사랑을 하고 또 받으며 산다. 그렇지만 가장 무섭고 위험한 것 또한 천의 얼굴을 한 사랑이다. 그 중에도 맹목적인 사랑은 그 본질을 변질시킬 뿐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마저도 황폐화 시킨다. ‘나는 네가 좋고, 네가 마음에 들며, 난 너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너를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네가 결혼을 하고 마누라가 있어도, 약혼을 하고 약혼자가 있어도 상관없으며,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해도 난 너와 함께 하는 게 좋고 너의 살 냄새가 무조건 좋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당장 안고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말이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정말 소름끼치고 밥맛 떨어지는 말이다.

“Play mist for me” 1971년에 만들어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어둠속에 벨리 울릴 때〉속 에블린이 DJ 데이브에게 하는 전화 내용이다.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라는 로버타 플렉(Roberta Flack)의 명 주제곡과 함께 개봉당시 전 세계 관객들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주며 히트 했던 영화다.

무엇보다 우리를 더 놀라게 한 건〈황야의 무법자〉,〈석양의 무법자〉마카로니 웨스턴 영화에서 늘 악당을 마주하여 손엔 장총을 들고 거센 모래바람을 맞으며 석양을 배경삼아 입에 시가를 물고 서있던, 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했다는 것이었다. 감독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처녀연출 치고는 놀랄만한 수준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도 아닌 ‘건맨’ 그였다는 사실이 의외였던 것이다. 훗날 그가 감독한〈용서받지 못한 자〉나〈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등 일련의 작품들을 볼라치면 전혀 놀랄 일도 의아해할 일도 아닌 잘못된 선입견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배우로서의 절제된 연기도 일품이었지만 직접 만드는 작품에 있어서 그 탁월한 선택이나 섬세하고 완벽한 감동을 담아내는 뛰어난 연출력은 이미 아카데미가 인정하고 칸느가 인정한다.

심야 라디오방송 DJ 데이브(클린트 이스트우드 분)에게 매일 밤 ‘미스트’를 신청하는 여자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즐겨가는 바에서 한 여자(애블린/제시카 월터 분)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그녀의 집에서 원 나잇 스탠드를 보내게 되면서 운명적인 악연의 관계는 시작된다. 그녀는 자기가 매일 밤 ‘Misty’를 신청한 것이란 사실을 밝히며 적극적인 애정을 표현하지만, 바람둥이 데이브는 별 뜻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다음 날 아침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가는 데이브의 뒷모습을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본다. 에블린의 집에서 돌아온 그는 그녀를 잊고 있지만 에블린은 그의 집으로 찾아와 마치 아내라도 된 것처럼 정성껏 식사를 준비한다. 단지 ‘하룻밤’으로 생각했던 데이브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당황하며 자기 집에서 나와 줄 것을 강요한다. 그는 약혼녀와 장래를 기약하며 난잡했던 여자관계를 정리하려 하지만, 반대로 그녀는 자기를 귀찮아하는 데이브에 대한 배신감이 커져만 간다. 급기야 데이브에 대한 애정은 증오로 변하고, 그녀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고 감시 한다. 비즈니스차 만난 여성 중역과의 만찬장에 나타나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심지어 그의 집에 나타나 자살 소동까지 벌이게 되면서 그는 약혼녀와의 만남의 장소에 조차도 나가지 못하게 된다. 결국 그는 에블린의 손아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그녀가 집착할수록 데이브는 연인인 토비에게로 도망을 가려하자, 마침내 데이브의 사랑을 차지하지 못하게 될 것을 깨닫고 증오로 가득 찬 살인마로 변한다는 이야기다.

애정과 애증은 다르다. 둘 다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상황이지만 실은 전혀 판이하게 다르다. 또 질투나 시기, 의처증과 의부증까지도 사랑이란 명분하게 사랑의 이름으로 자행되지만 분명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반드시 그 방향이 내가 아닌 상대를 향해 있어야 하고, 내가 아닌 상대를 위함에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

“당신은 오로지 나만의 나만을 위해 존재해야 해!” 오사마 나기사의〈감각의 제국〉에서 부인을 속이고 요정에 틀어박혀 사랑을 나누던 ‘기치조’와 ‘사다’의 사랑은 애정을 넘어 육체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고, 결국 사다는 연인 기치조를 영원한 자기의 남자로 남게 하기 위해 사랑의 이름으로 기치조를 거룩하게 교살하고 그의 생식기를 잘라 간직한다.

사다와 에블린의 사랑은 현실 속 우리 주변에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이다. 애를 둘이나 낳고 결혼해서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어느 날 느닷없이 초인종을 울리고 마누라에게 “할 말 있다”며 현관을 들어서는 헤어진 옛 애인을 만나거나, 오래 전에 헤어졌던 연인이 마지막으로 한번만 같이 있어달라는 부탁에 ‘그 정도쯤이야’ 하고 들어갔다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침대 밑에 숨겨 놓았던 식칼의 춤바람을 당하는 경우가 이젠 먼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사랑이 다 사랑이 아니듯, 여자 또한 다 같은 여자 아니다. 사랑도 여자도 가까이 하기엔 위험하고 두려운, 천의 얼굴을 가진 알 수 없는 존재임엔 틀림이 없다. 한 순간 ‘원 나잇 스텐드’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던 데이브는 집요한 에블린의 광기에 혐오를 느끼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우리는 지금 누구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안개 속 미로를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지금 이 행복이 끔찍해하며 후회하는 내일이 아니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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