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 | 편집팀 기자] 초애(草涯) 장만영 시인(1914〜1975)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집이 출간 됐다. ‘국학자료원’에서 출간한 ‘장만영 전집(전4권)’은 시인의 시집을 2권으로, 산문과 일기를 각각 1권씩 묶었다. 이번 전집은 장만영 시인의 시집 8권 외에도 미발표시, 수필과 번역시, 일기 10권 등을 추가해 문학사적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
장만영 시인은 1914년 황해도 연백군 배천(白川)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 배천온천호텔을 경영한 기업인이기도 했다. 시인의 장남인 장석훈 대한언론인회 전문위원에 따르면, 배천온천을 발견하고 개발한 것은 시인의 부친인 장완식 이었다. 당시 양조장 등을 경영했던 장완식이 고향 배천에서 겨울철 논두렁을 지나다가 물이 얼지 않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하고 파보니 온천수가 쏟아져 온천장을 열었다고 한다. 배천온천에는 당시 식민지 조선 명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날개’의 천재 소설가 이상과 기생 금홍이의 러브스토리 무대도 배천온천이었다. 시인의 작품 중에는 유독 ‘온천’‘온실’ 같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온천수를 이용한 온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라고 한다. 배천온천에는 재력을 바탕으로
당시 문인과 예술가들을 후원해 예술계 인사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1932년 김억의 추천으로 시단에 나온 장만영 시인은 정지용· 김기림·김광균과 함께 1930년대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으로 꼽힌다. 정지용 등이 서구식 근대문화의 공간인 도시를 작품 무대로 삼은데 반해, 장만영은 시골 마을의 산과 들판 등 전원과 자연을 노래했다. 그의 대표작 ‘달·포도·잎사귀’는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서정성을 드리운 그의 시 세계를 잘 드러낸다.
장만영 시인의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초애(草涯). 1927년 황해도 배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경성 제2고등 보통학교(현 경복고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동광 東光’ 지 5월호에 시 ‘봄노래’가 김억(金億)의 추천을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등단했다.
1934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삼기영어학교 고등과에 입학하고, 같은 해 시인 신석정의 처제 박영규(朴榮奎)와 결혼했다. 경성 제2고등 보통학교를 졸업 후 김억과 사제의 관계를 맺었다.
1944년 고향에서 배천 온천을 경영하다가 1948년 서울에 올라와 출판사 산호장을 경영하면서 김기림 등 문우들의 시집을 발행했다. 1950년 6.25때에는 ‘전선문학 戰線文學’을 간행하고 1954년엔 서울신문사 출판국장을 역임하면서 ‘신천지’와 학생문예지 ‘신문예’를 주간했다.
1959년에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1966년 시인협회 회장에 선임 되었고, 1968년에는 신시60주년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역임하다가 1975년 10월에 급성췌장염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그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천주교묘역에 안장됐다. 장석훈 전문위원은 “1950〜1960년대는 한국의 현실이 녹록치 않을 때였고 춥고 배고픈 문인 가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터였다”며 “아버지는 신문사, 방송국, 잡지사 등에서 들어오는 원고 청탁을 받아 밤샘 작업을 하면서 커피와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러한 작업이 건강을 심하게 해쳤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장만영 시인의 저서로는 1937년에 발간도니 첫 시집 ‘양 羊’ 제2시집 ‘축제’와 제3시집 ‘유년송’, 그 뒤 ‘밤의 서정’ ‘저녁종소리’ ‘장만영선시집’ ‘등불따라놀따라’ ‘저녁놀 스러지듯이’ 8권의 시집 외에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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