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묻은 가엾은 어린 꽃잎들

세 명의 여고생을 숨지게 한 통학버스 운전자의 자살. 숭고한 죄책감일까, 아니면 뒤늦게 드러난 추악한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지난달 29일 밤 9시 경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여고생들을 향해 승합차 한대가 돌진했다. 운전자는 발가락이 뭉개질 정도로 브레이크를 밟고 학생들을 피해 핸들을 꺾었지만 2명의 여학생이 차에 치여 현장에서 숨졌고 차와 함께 5m 낭떠러지로 떨어진 소녀는 반나절 만에 병원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건이 벌어진 지 나흘 뒤인 지난 3일 밤, 문제의 승합차를 운전했던 박모(60)씨가 한 주택가 향나무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자신 때문에 숨진 학생들에게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긴 뒤였다. 평소 통학버스에 타는 학생들을 친 손녀처럼 예뻐했다는 고인의 죄책감이 부른 숭고한 희생이라는 애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사건의 반전은 고인의 장례식이 치러진 지 불과 하루 만에 터져 나왔다. 운전자 박씨가 사고 당시 만취상태로 운전대를 잡았다는 정밀감식 결과가 나온 것이다. 자상한 할아버지의 희생과는 거리가 먼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부산 사상경찰서는 지난달 29일 부산 사상구 대덕여고 비탈길에서 사고를 낸 승합차 운전자 박씨의 사고 당시 혈중 알코올 농도가 0.134%(면허취소 및 벌금)였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난 5일 밝혔다. 이 같은 결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정밀감식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소주 한 병 마신 뒤 운전?
다시 말해 사고 당시 박씨는 약 소주 1병을 마신 뒤 운전대를 잡았다는 얘기다. 발가락이 뭉개질 정도로 브레이크를 밟고 온몸에 피멍이 든 채로 ‘내가 대신 죽었어야 했다’며 울부짖은 윤씨의 생전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사 결과다.
일각에선 죄책감에 시달리던 박씨가 음주 사실까지 적발될 위기에 놓이자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과연 2008년 10월 29일 밤 9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지난달 29일 밤 9시 10분 경, 부산 대덕여고 앞에서 15인승 통합용 이스타나 승합차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여고생 11명을 잇달아 치고 5m 아래 계곡으로 추락하는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다.
차에 치인 신모(17), 정모(17)양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계곡으로 떨어져 차에 깔린 석모(17)양은 다음날 아침 8시경 끝내 목숨을 잃었다. 또 차에 치인 8명의 학생과 박씨를 비롯해 승합차에 타고 있던 12명의 여고생 등 22명이 중경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경찰에 따르면 사고 당시 박씨의 승합차는 브레이크가 파열 돼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박씨의 부인 이모(60)씨는 “2003년 구입한 차의 정기 검사를 매번 빠트리지 않고 받았는데 안전 검사 과정을 모두 통과했다”며 차량 결함과 검사 소홀 문제를 지적했다.
박씨는 사고 당시 차를 제어할 수 없자 학생들을 피해 절벽 쪽으로 차를 몰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차의 운전석 부분이 심하게 찌그러진 것으로 볼 때 그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운전석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는 정황도 나왔다.
전신 타박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박씨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은 고장 난 브레이크를 밟아댄 충격으로 심하게 뭉개졌다. 이는 사고 당시 그가 참극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5년 가까이 대덕여고 학생들의 통학버스를 운전했던 박씨가 익숙한 길이라는 것을 과신하고 술까지 마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각에서는 사고 직전이 아니라 하루 전에 마신 술이 미처 깨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운전대를 잡은 게 아니냐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박씨가 정확히 언제, 얼마만큼의 술을 마셨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5년 간 운영하던 제과점을 정리하고 2003년 통학버스 운전사로 나선 박씨는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차 안에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 등 학생들 간식까지 챙겨 다닐 정도였다. 박씨의 아내는 “사고를 당한 뒤 입원 중이던 남편은 TV에서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하염없이 울었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유서에 “시신 기증해 달라”
학생들을 아꼈던 박씨가 사고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다. 이씨는 “남편이 전 재산을 죽은 아이들을 위해 내놓고 교도소에 갈 작정까지 했었다”며 통곡했다.
박씨가 아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것은 지난 2일 밤. ‘피곤할 테니 집에서 자고 오라’며 부인을 돌려보낸 박씨는 그 길로 병원을 빠져나와 부산 사하구의 한 빈집에 있는 향나무에 목을 맸다. 생전에 부인과 함께 장기기증 서약을 했던 박씨는 유서에서도 ‘부산 백병원에 시신을 기증해 달라’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신은 기증 받지 않는 의학계 관행 탓에 그의 마지막 바람도 사건의 실체와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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