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개 국정원 X-파일 열리면 세상 놀랄 것”

정치권력이 바뀌면 지난 정권의 실정이나 비리 의혹들이 도마 위에 오른다. 동시에 당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광주민주화 항쟁, 인혁당 사건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빨갱이로 낙인찍힌 채 보수당이 집권하는 내내 침묵을 지켜야 했다. 이들이 비로소 울분을 터뜨릴 수 있었던 때는 진보정권으로 교체된 뒤였다.
이 처럼 정치·사회적 사건에 휘말려 흙탕물을 뒤집어 쓴 이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1990년대 말 나라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북풍사건’의 주인공들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이들에 속한다. 여기서 북풍공작사건은 1997년 12월에 발생한 것으로,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가 당시 대선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막기 위해 꾸민 공작을 말한다.
이 사건은 한국 근현대정치사의 대표적인 정치공작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일반인들은 이 사건을 그저 권모술수와 음모로 뒤덮인 흑색정치의 표본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사건의 당사자들은 말한다. “진실이 정치공작에 이용되는 바람에 거짓으로 둔갑해버렸다. 하지만 당시 안기부가 밝힌 내용은 모두 사실이다.”
사건의 주체는 권영해 부장을 비롯한 북풍관련 안기부 직원들 그리고 윤홍준씨다. 이들은 사건의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질이 호도돼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언젠가는 훼손된 자신들의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말하는 북풍공작의 실체는 무엇일까. 북풍사건 당시의 그 긴박한 순간으로 다시 되돌아가 보았다.
1995년경 각 정당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다방면으로 북한과의 접촉을 꾀했다. ‘흑금성’이라는 공작암호명으로 잘 알려진 박채서씨는 이때 북한과 접촉한 남한 정치인을 파악해 안기부에 보고했다. 그는 이런 사실을 보위부를 통해 확인했다.
대선의 열기가 점점 달아오르던 1997년 8월경 박씨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시 남측의 유력 대선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원치 않는것으로 파악했다. 박씨는 김 위원장이 자신보다 젊은 이인제씨가 남조선의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안기부에 보고했다.
사건 발단된 첩보보고
이어 11월 20일 서울국제우체국은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하고 이를 안기부에 알렸다. 그것은 10월 31일 평양시 중구역에서 오익제씨가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에게 보낸 편지였다. 안기부가 조사한 결과 편지를 쓴 사람은 오씨가 틀림없었다. 오씨는 97년 월북한 전 천도교 교령이다.
오씨의 편지에는 “이북에서는 후광(後廣: 김대중 대통령의 아호)선생님의 대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후광 선생님이 집권하면 금세기 안에 반드시 통일 성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당선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이 편지를 공개하려 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권 전 부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작업을 계속했다.
권 전 부장은 오씨의 월북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했다. 또 권 전 부장은 김 전 대통령이 오씨와 전부터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도 북한과 계속 커넥션을 이어오고 있다는 근거(오씨와 찍은 사진 등)를 마련했다.
북풍공작사건은 이때부터 눈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안 국민회의 측은 “안기부가 정치공작을 꾸미고 있다”고 즉각 반격했다. 이때 권 전 부장은 언론이 김 전 대통령을 몰아세울 것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언론은 미온적인 보도만 할 뿐 김 전 대통령을 몰아세우지 않았다.
권 전 부장은 공작의 강도를 높였다. 김 전 대통령과 오씨가 같이 찍은 사진과 오씨의 편지를 다량 복사해 주요 기관에 뿌렸다. 이어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를 동원, 〈김대중 후보는 오익제 편지와 관련된 의혹을 해명하라〉는 성명을 발표케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아말렉 공작’의 함정
다급해진 권 전 부장은 강수를 놓기로 결정했다. 재미동포 무역업자 윤홍준씨를 내세워 기자회견을 기획했다. 윤씨는 일본, 중국, 북한을 드나든 인물로 실은 안기부의 정보원이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6일 권 전 부장은 이대성 해외공작실장을 불러 윤씨의 기자회견 준비를 지시했다. 이 같은 지시가 있자 안기부 내에선 반대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권 전 부장은 결국 기자회견을 강행했다. 이것을 ‘아말렉 공작’이라 명명했다. 아말렉은 성경에 나오는 이방인으로, 안기부는 친북인사라는 의미를 담았다.
윤씨는 “허동웅이라는 조선족 사업가가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국민회의 조만진 조직 1국장과도 연결돼 있다”고 안기부에 보고한 적 있다.
권 전 부장은 이 보고를 근거로 국민회의가 북한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안기부의 이대성 실장, 송봉선 단장과 김모, 이모 직원은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김 전 대통령의 당선이 유력시 됐고 안기부는 발등에 불 떨어진 듯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 해 12월 11일 윤씨는 베이징에서 한국 특파원을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국내 언론의 반응은 냉담했다. 윤씨는 다음날 황급히 도쿄로 날아가 다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역시 보도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윤씨는 서울에서 세 번째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번에도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 보도되는데 그쳤다.
이후 권 전 부장은 김 전 대통령이 자신의 3단계 연방제안이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일부 상통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발언한 내용을 녹음한 것을 각 방송사에 돌렸다. 이 역시 전파를 타지 못했다.
북풍사건 주역들 근황
1998년 2월말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자 서울지검 공안부는 수사기획단을 만들고 윤씨 기자회견 등 북풍공작사건을 집중조사하기 시작했다. 검찰은 안기부 직원들을 줄줄이 구속기소했다. 검찰 수사로 안기부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권 전 부장을 비롯한 안기부 직원들이 공작의 실패로 역풍을 맞은 것이다.
당시 공작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살았던 안기부 직원 이모씨는 언론에 보도된 북풍공작사건이 상당부분 소설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씨는 “북풍공작사건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완전히 다르게 알려진 부분이 많다. 이 부분을 꼭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북풍공작사건은 그 의도가 정치적이었다는 것이 문제일 뿐 본질 자체는 진실이라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이씨는 “당시 윤홍준씨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은 모두 수년간 안기부에서 수집한 첩보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라며 “안기부에선 정보의 신뢰성을 위해 3중 4중으로 검증작업을 거친다. 그렇게 확인한 정보들을 기자회견에서 폭로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북풍사건으로 누구보다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이 윤홍준씨다. 언론보도만 접하는 게 전부인 일반 사람들은 그를 안기부에 매수된 사기꾼 같은 인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론 그게 아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그는 북한의 김정남과 개인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일 만큼 북한에 대해 정통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업을 통해 번 재산이 많기 때문에 돈 몇 푼 때문에 안기부에 매수돼 기자회견 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라고 이씨는 전했다.
<일요서울>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윤씨는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으며, 북풍사건 이후 건강이 악화돼 치료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윤씨와 연락이 닿고 있는 한 인사는 “윤씨가 암 당뇨 등으로 투병 중이며, 일상적인 거동조차 불편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윤씨가 안기부에 전화를 걸어 “안기부가 공작을 꾸민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거액의 돈을 뜯어냈다는 부분도 언론이 만들어낸 소설이라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이씨는 “윤씨는 북풍공작 이전부터 우리(안기부)와 일했고 그만큼 신뢰관계가 형성돼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그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 다만 윤씨에게 안기부가 돈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가 기자회견으로 인해 입은 피해를 감안해서 안기부에서 챙겨준 돈이다. 그는 북풍사건으로 막대한 재산 뿐 아니라 명예까지도 심각하게 훼손되지 않았나. 그런 걸 약간이나마 보상한 것이다”라고 이씨는 말했다.
756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윤지환 기자 jjh@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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